황제의 자리가 약속된 남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15대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로서, 그의 사망 후 양형제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같이 황제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사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는 14대 황제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에게 양자로 들일 것으로 지정한 것으로,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볼 수 있다. 황제가 되었던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후계자를 거부하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온화한 성격 때문인지, 그러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삭빠르게 행동한 모습도 보이는데,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의 딸은 베루스와 약혼 시키고, 아우렐리우스는 베루스의 남매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하였었다. 그런데 안토..
합종연횡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여러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시대였고, 많은 사상가와 전략가 등이 명성을 얻고 출세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였다. '소진' 본래 '주나라'의 '낙양'사람인데 친구인 '장의'와 함께 '제나라'로 가서 '귀곡자'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하산하여 '진나라' 등을 돌아다니면서 유세하였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출세하지 못하고 빈곤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를 보고, 그의 아내는 짜고 있던 직물을 멈추지도 않았고, 형수는 밥도 주지 않았다고 하니, 상당히 홀대 받은 것 같다. 이에 기분이 상한 소진은 방에만 틀어막혀서 책을 읽고 공부하였는데, 잠이오면 손을 송곳으로 찔러가면서 하였다고 한다. 1년 정도 병법과 독심술을 공부한 그는, 어느날 이정도면 군주들..
선종외시(先從隗始) '악의'의 선조는 위나라의 명장인 '악양'이라는 인물로, '위 문후' 때에 '중산'을 정복한 공으로 '영수'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악의가 태어난 시기나 위치는 불문명하지만, 대대로 영수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땅은 후에 '조나라'의 '무령왕'에게 점령되어, 악의는 조나라 사람이 된다. 악의는 조나라에서 관직을 지냈는데, 무령왕이 죽고나서는 '위나라'로 갔다고 한다. 이무렵 '연나라'는 '제나라'에게 공격받아 사실상 속국의 상태였는데, '연 소왕'은 신하인 '곽외'에게 우수한 인재를 모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었다. 이게 곽외는 우선 나부터 중용하라고 말하였다. 연 소왕은 곽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를 위한 저택을 지어줬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많은 인재들이 ..
제나라의 멸망의 위기 '전단'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전단은 본디 중국 전국시대에 '제나라' 사람으로, 제나라의 왕족인 '전'씨의 먼 친족이라고 한다. 그는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에서 시장을 관리하는 직책에 있었다고 한다. 제나라는 원래 '태공망'이 건국하여 '여'씨의 국가였다고 하나 후에 신하였던 전씨가 찬탈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284년 '제 민왕'은 강력한 국력을 믿고 교만하였는데,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합종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는 수도인 임치까지 점령하였다. 제 민왕은 '거' 땅으로 달아났고, 전단 또한 안평 땅으로 피난을 가게되었다. 그러나 제나라에는 아직 70개가 넘는 성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제나라 사람들은 방심하고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 같..
몰락한 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코르넬리우스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술라는 코르넬리우스 중에서도 주류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고, 그의 선조때부터 이미 정치권에서 배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몰락 귀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는 젊은 시절 로마의 하층민들과 함께 공동주택에서 지냈으며, 가지고 있던 재산은 로마의 해방노예들과도 별반 다를게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귀족출신으로 평민과는 달랐는데,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다는 것을 보면 귀족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어찌되었든 코르넬리우스의 일원으로, 그 이름과 연줄이 그의 정치 생활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나라 건국의 개국 공신 '이적'의 원래 이름은 '서세적'으로 원래부터 성이 '이'씨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중국 산동성인 '조주' '이호'의 부유한 집안 출인이었던 것 같은데, 수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17세의 나이로 반란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 '적양'을 따라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후에 '이밀'을 따랐다가, 이후 장안을 제압한 '이연'에게 귀순하였다고 한다. 이 이연이 바로 당나라를 세우는 고조가 되는데, 서세적은 공신으로 인정을 받아 '이' 성을 하사 받아 '이세적'이 되었다. 이세적인 된 서세적은 '동돌궐', '설연타',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후 당시 '진왕'이었던 '이세민'이 '태종'이 되면서 휘호를 피하기 위해, 이세적에서 다시 이적으로 개명하였다. 당태종 이..
평민 출신 로마의 영웅 보통 3개 이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다른 로마의 인물들과 달리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2개의 이름 밖에 없는데, 이는 그가 귀족이 아닌 평민이며, 별다른 배경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는 몇번의 법 개정을 통하여, 평민 출신의 사람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지만, 귀족들처럼 부와 지위, 연줄이 없는 평민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에 평민들은 공직에 진출하고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귀족들과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귀족의 후원을 얻는 대신 그들이 이익을 대변하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많은 로마의 유명인들과 다르게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출세는 상당히 느렸으며, 그만큼 철저하게 그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로마와 동맹시 로마는 기원전 280년에 일어난 '피로스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로마의 영향력 안에 넣었다는 것이지, 모든 영토를 로마가 직접통치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로마의 영향권 안에는 로마가 직접통치는 지역과, 로마의 동맹시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위의 지도에 녹색부분이 로마의 영역이고, 빨간색 부분은 동맹시의 영역이었다. 동맹시들은 각각의 도시국가의 형태로 유지되며, 기본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운영하였으나, 로마에 세금과 병역을 제공해야 하였으며, 개별적인 외교권이 없이 로마라는 연합체의 일 구성원으로 취급되었다. 동맹시들은 이러한 처우에 상당히 만족하였는데, 로마 시민들보다 책임이 덜한데 비해, 전쟁의 전리품을 분배하거나 ..
야심만만한 누미디아의 공동 통치자 기원전 148년,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와 동맹하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싸웠던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의 지역에 있는 '카르타고'의 인접국으로, 카르타고가 완전히 몰락한 이후에 로마의 동맹으로서 일대를 제패하고 있었다. 마시니사는 당시가 고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오래 살았는데,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아내들과의 사이에서 86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마시니사는 사후에 아들 중에 '미킵사'와 '마나스타발', '굴룻사'의 3명에게 나라를 나누어주어 통치를 맏겼다. 그러나 마나스타발과 굴룻사는 병으로 일찍 죽어 미킵사가 단독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유구르타'는 ..
멈출줄을 모르고 계속 확장하는 로마의 영향력 로마가 건국되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그 영향력을 꾸준히 확장하여 주변세력과 갈등을 겪으며,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세력권 안에 넣는데 500년의 세월이 걸렸다. 로마는 그동안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고, 로마의 경제와 로마 군단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인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자영농민들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외부로 세력권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넓은 평원에서 대량의 곡물이 로마로 들어왔고, 넓어진 영향력을 유지시키며 동시에 더 넓은 세력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본업인 농업에서도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북제의 황족 고장공 '고장공'(高長恭)의 할아버지는 '고환'이라는 인물인데 '북위'의 중신으로, 후에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고양'이 '북제'를 건국하면서 '신무제'로 추존되었다. 아버지는 고환의 장남인 '고징'인데, 고환이 실권을 잡고 있던 동위의 중신으로 활동하였으며, 29세의 나이로 암살되었다. 사망 당시 고징의 장남인 '고효유'는 13세의 어린나이 였기 때문에, 고징의 동생이었던 고양이 뒤를 이어받았으며, 후에 북제를 건국하면서 고징을 '문양황제'로 추존하였다. 고장공은 고징의 넷째아들인데, 장공은 자로, 그 이름은 숙(肅)이며 효관(孝瓘)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541년 고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의 어머니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좋은 신분..
찬탈자 '네로' 황제의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로 그의 어머니인 '율리아 아그리피나'(小아그리피나)가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고 있었지만, 혈통만으로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로마에서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잦은 폭력행위와 범죄로 구설수에 올랐고 재판을 받아 사형 판결까지 받았던 인물로, 후에 사면되었지만 그가 태어난지 2년만에 사망하였다. 그런 네로의 운명은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로마 제국의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면서 완전히 바뀌게 된다. 클라우디우스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그로 인해 어렸을때부터 차별을 많이 당해왔는데, 그로 인한 심약한 성격과 반복된 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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