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기원전 기원전 84년, 혹은 기원전 81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친부는 기원전 77년에 집정관을 지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인데, 후에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게 입양되어, 성을 바꾸지 않고 이름 뒤에 그대로 알비누스를 붙였다고 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에 해당되었던 그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치루는 동안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는데, 이때 뛰어난 기량을 보여 카이사르에게 총애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56년에 '베네티족'과의 전투에서는 함대를 지휘하였으며, 기원전 52년에 '갈리아족'의 총 궐기로 '베르킨게토릭스'와 싸울때도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와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85년 로마의 '유니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니우스 가문은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폭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내고 로마 공화정을 이룩하는데 공헌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인데 기원전 77년 로마를 장악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을때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로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카토)와 이부남매이다. 그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유명했는데,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자식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파르티아 원정과 첫번째 배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85년에 태어났다. 유력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유명한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53년 시리아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밑에서 재무관을 지낸 것이 첫 공직생활인데, 이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실시 할때 함께하였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크라수스에게 너무 적진 깊숙이 진격하지 말 것을 진언 하는 등 군사적 조언을 하였으나, 크라수스는 그의 조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카르헤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로마 군단은 파르티아 군대에 대패하고,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 모두 전사하였다. 이때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전세가 기울자 500명의 기병과 함께 도주하였는데, 이 ..
두 명의 영웅 기원전 49년 로마에는 두명의 영웅이 있었다. 한명은 젊은 시절부터 전쟁에 참여하여, 히스파니아와 지중해, 동방을 석권하여, '위대함'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이고, 다른 한명은 40세까지는 이렇다 할 큰 성과도 없었지만, 7년만에 넓은 '갈리아' 지역을 모두 평정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두 사람은 한때 '삼두정치'를 통해 연합하기도 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삼두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해체되어 정치적 연결고리가 끊겨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폼페이우스는 삼두정치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해졌으며, 기존에 자신을 견제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과..
로마의 명문 귀족 율리우스 가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의 명문 귀족인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리우스 가문은 원래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난 '알바롱가'의 귀족으로, 로마가 왕국인 시절 로마의 3번째 왕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통치시기에 알바롱가가 로마로 편입되면서 로마의 일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율리우스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시조를 '베누스'(아프로디테)와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율루스'라고 주장하였는데, 율루스는 바로 알바롱가를 세웠으며, 로물루스와 레무스도 혈통상 율루스의 자손이 된다. 물론 이것은 율리우스 가문의 주장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로마에서 로마의 시조와 자신들의 시조가 한 핏줄이라는 주장을 하고도..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노려진 아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132년 '폰토스 왕국'의 수도인 '시노페'에서, 폰토스 7대 국왕인 '미트리다테스 5세'의 아들로 테어났다. 어머니는 '라오디케'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의 딸이었다고 한다. 폰토스 왕국은 흑해에 인접한 아나톨리아 지역에 있는 나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그의 후계자중 하나인 '미트리다테스 1세'가 왕국을 세웠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짙게 계승한 곳이었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차기 국왕으로서 교육을 받아왔다는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미트리다테스 6세가 15세 무렵, 아버지인 미트리다테스 5세가 참석한 연회에서 암살당하였는데, 아내인 라오디케와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
로마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경에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있는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알려진 사실이 없다. 스파르타쿠스는 건장한 체격에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략이나 전술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 같기 때문에, 트라키아 지역 출신으로 생각되어지며, 로마가 트라키아 지역에서 벌인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병사나 혹은 지휘관급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 검투사들이 일으킨 반란과 그 경과에 대해 상당히 수치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을 꺼렸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된 기록도 남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실공히 당시 세계 최고의 국가였다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일어난 이런 이례적인 사건은 ..
로마 최고의 부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15년경 '리키니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리키니우스 가문은 로마의 전통 귀족은 아니었으나, 초대 호민관 중 한명이 리키니우스 가문의 일원 이었으며,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으로 유명한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대표적이다. 크라수스의 아버지는 기원전 97년에 집정관에 당선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인데, 기원전 87년에 있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대표되는 평민파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로 대표되는 원로원파 사이에 일어났던 내전 중에 평민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후 크라수스는 로마를 탈출하여 '히스파니아'지역으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84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끝낸 술라가 그리스에서 ..
사산왕조의 페르시아 원정 '마르쿠스 누메리우스 카루스'는 222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의 출생지나 부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카루스가 본래 로마인이 아니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당시가 '군인 황제 시절'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카루스의 출세 경위나 공직 경험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행정적인 경험과 군사적인 경험 모두 풍부하며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282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황제의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로부스는 바로 그 해에 '페르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동방 원정을 떠났는데, 원정 도중 이루어진 토목 공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군단의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병사들의..
팔미라의 왕비 '제노비아'는 240년경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에 속한 도시 '팔미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내용은 없으나, 승마와 사냥을 즐겼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적 지휘가 있는 가문의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동서양의 문화가 충돌하는 무역이 활발한 지역의 출신 답게, 이집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시리아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255년경 그녀는 14세에 같은 팔미라 출신의 유력자인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와 결혼 했다. 260년 로마 제국의 황제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와의 '에데사 전투'에서 패해 포로로 잡혔고, 이후 승기를 잡은 페르시아는 대대적으로 로마 제국이 동부로 쳐들어왔다. 당시 로마 제국은 ..
분열된 제국의 황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는 214년경 '다뉴브 강' 인근의 '일리리아'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현지인의 농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235년경부터 군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 황제의 기병대 지휘관인 '아우레올루스' 휘하에서 기병 군단의 장교로 공적을 쌓았을 것으로 보이며,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황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승진하였으며, 269년 발칸 반도를 침략한 '고트족'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고트족과 로마 군단에 전염병이 돌았고, 270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도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원로원 의원들..
포로가 된 황제와 제국의 분열 260년 로마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가 공동 황제로 협동 통치의 형식으로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두 황제는 각각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발레리아누스가 동부를, 그리고 갈리에누스가 서부를 중점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로마 제국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로, 제국의 외적인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내부의 반란에도 신경써야 하는, 통치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페르시아와의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 군단이 패배하여,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혀가면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갈리에누스는 로마 제국의 단독황제가 되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이자, 공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