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의 운명을 바꾼 싸움 「파르살루스 전투」
- 역사
- 2023. 3. 21.
두 명의 영웅
기원전 49년 로마에는 두명의 영웅이 있었다. 한명은 젊은 시절부터 전쟁에 참여하여, 히스파니아와 지중해, 동방을 석권하여, '위대함'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이고, 다른 한명은 40세까지는 이렇다 할 큰 성과도 없었지만, 7년만에 넓은 '갈리아' 지역을 모두 평정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두 사람은 한때 '삼두정치'를 통해 연합하기도 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삼두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해체되어 정치적 연결고리가 끊겨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폼페이우스는 삼두정치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해졌으며, 기존에 자신을 견제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된 카이사르를 정치적 또는 물리적으로 배제하려고 하였다. 결국 무장해제를 하고 일방적으로 처분을 받으라고 권고하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 대해, 카이사르는 1개의 로마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내전이었지만, 전세는 카이사르에게 유리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제대로된 대항도 하지 않고, 이탈리아를 떠나 자신의 영향력이 강해 근거지에 비교될 수 있는 그리스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폼페이우스의 승리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를 탈출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자신의 근거지였던 갈리아 지역을 손에 넣었지만, 내전이 확대되면서,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그리스를 포함한 동방 지역까지 제압할 필요가 생겼다. 카이사르는 먼저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평정하면서, 방비가 강한 그리스 지역으로 상륙할 기회를 찾기로 하였다. 기원전 48년에 카이사르를 그리스 지역으로 건너가 폼페이우스 휘하의 군단과 싸움을 개시하였고, 폼페이우스의 본진에 해당하는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의 군단이 패배하였고, 카이사르는 그리스 동부의 '테살리아'로 이동하였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하면서도 계속하여 협상을 요구하였지만,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결국 기원전 48년 8월 9일 테살리아 인근의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파르살루스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에게 상당히 불리하였다. 폼페이우스측은 보병 47,000명에 기병 7,000명 이었던데 비해, 카이사르측은 보병 22,000명에 기병 1,000명에 불과했다. 물론 기존이 로마 군단이 열세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상대로 승리한 적이 여러번 있으나, 대부분 이민족을 상대로한 싸움으로, 그 무장상태나 훈련상태 등의 양쪽 군대간의 질적인 차이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번 내전은 로마 군단과 로마 군단의 싸움이었다.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군단은 7년에 걸친 갈리아 원정을 겪은 정예병이라곤 하지만, 폼페이우스 군단도 실전으로 숙련된 지휘관들 아래에서 로마식 훈련을 마친 병사들로 군사 장비도 동일하였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이런 숫적 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카이사르의 군단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한니발 바르카'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한 포위섬멸 전술도 로마 군단의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바로 이 전술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기병의 압도적인 숫자를 이용하여 카이사르의 기병을 패퇴시키고, 보병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물론 이 전술은 카이사르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폼페이우스는 알고 있었겠지만, 상대가 알고 있는 전술을 사용하면서도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 만큼의 병력 규모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카이사르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적의 기병에 대한 대비책으로 2,000명의 정예보병을 따로 편성하여 빠르게 대응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폼페이우스측에서는 선제돌격도 감행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사실 이 당시 전투는 두 군대가 일정 거리를 두고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정열하였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달려나가서 맞부딫히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이 방식은 단순히 달려가서 공격하는 방식을 통해 공격하는 힘에 추진력을 더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행위자체로 적을 위축시키고, 스스로를 고무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측에서는 이러한 이점을 포기하는 대신 카이사르 군단의 보병이 뛰어가야하는 거리를 두배로 늘림으로서, 적을 지치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카이사르측 보병들은 당황하지 않고, 중간에 한번 멈춰서서 숨을 고른후 다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술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결국 폼페이우스측에서 기병을 투입하면서, 전투의 향방은 양쪽 기병의 힘싸움에 달리게 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카이사르 군단의 기병들은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이 오자 슬쩍 옆으로 비켜났다.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카이사르가 미리 준비해 놓은 정예보병들이었다. 전면을 차단당한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이 멈춘 동안 카이사르의 기병들이 배후를 막아서면서 포위되게 되었다. 사실 이 전술은 꽤나 무리수를 둔 것인데, 기본적으로 보병들이 기병들을 상대하는 것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 군단은 정예보병들과 기병의 숫자를 다 합쳐도 폼페이우스의 기병들 숫자의 반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병전에서 카이사르측이 승리하였는데, 사실 이 시대에는 '등자'가 아직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기병들은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말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버텨야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말에 오르고, 타고 달리는 것 만으로도 엄청 힘든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로를 차단당해 한자리에서 선채로 보병을 계속 상대하는 것은 기병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로서 폼페이우스의 전술은 실패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물리친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반대로 폼페이우스 군단의 진형을 뒤에서 압박하였고, 결국 진형이 무너지면서 카이사르 군단이 승리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승리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폼페이우스는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단의 전사자는 200명 뿐이었지만, 폼페이우스 군단에서는 6,000명 혹은 15,000명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이는 어느정도 과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머지 24,000명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군단의 지휘관은 대부분 도주하고 있어, 결국 내란이 완전히 종식되는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서 '알렉산드리아'까지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배신당하여 살해되었다. 이로서 카이사르는 명실공히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