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카이사르 암살 공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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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85년 로마의 '유니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니우스 가문은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폭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몰아내고 로마 공화정을 이룩하는데 공헌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인데 기원전 77년 로마를 장악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을때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로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카토)와 이부남매이다. 그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유명했는데,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자식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그리스의 '아테네', '페르가몬', '로도스섬'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군사적인 쪽으로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군 경력을 쌓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카토가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부임할때, 그를 보좌하면서 정치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이때 고리대금업을 통해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로마로 돌아와서는 원로원파로서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는데, 특히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싫어했다고 한다.

카이사르 애인의 아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를 위시한 원로원파와 카이사르의 갈등이 내전으로 치달았는데,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 쪽에 가담하였다. 반면 카이사르는 애인이었던 세르빌리아의 부탁을 받고, 부하들에게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죽이지 말 것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행보 없이 폼페이우스의 진형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 같고,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가 몰락하게 된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사면받고 석방되었는데, 사실 카이사르는 내전 동안 생포되거나 항복한 사람들을 죄다 사면해 주었기 때문에, 이것은 세르빌리아의 부탁이 없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로마로 돌아간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46년에는 '갈리아 키살피나'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는데, 당시에는 아직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그의 삼촌에 해당하는 카토와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등이 저항을 계속하던 시기 였기 때문에, 이는 카이사르가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배려하여 안정적인 지역에서 공직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에 돌아왔을때, 갑작스럽게 부인과 이혼하고 내전에서 사망한 카토의 딸과 재혼하였는데, 내전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계속 카이사르의 호의를 받았으며, 기원전 44년에는 법무관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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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암살과 최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다른 공범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는 카이사르 암살 직후 '폭군은 반드시 이렇게 된다'던가 '자유가 회복되었다'고 외쳤다고 하는데, 그에 호응한 로마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사실 당시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되긴 하였으나, 카이사르를 폭군이나 자유를 억압하는 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원로원파 의원들을 포함한 일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반대로 많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억압하고 법 위에서 자신들을 착취한 원로원파 의원들이야 말로 폭군이고 억압자였을 것이다. 결국 제대로된 명분도 없이 이루어진 암살은 표면적으로 성공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하였다. 암살의 주모자였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사후 주도권을 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중재아래, 동방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도망치듯 로마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이내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이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하고 카이사르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케도니아'의 총독인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군대를 모아, 그리스 지역에서 함께 저항하였다. 기원전 42년 마케도니아 동부의 필리피 평원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단와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군단가 진지를 구축하고 대치하였다. 서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모색하던 두 군단은 의도치 않게 시작된 난전을 벌였는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군단이 싸우고, 옥타비아누스와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군단이 싸우는 양면전이 되었다. 이 첫 싸움에서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군단이 옥타비아누스의 군단을 물리치고 승리하였고, 반대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단은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군단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전체적인 결과로 봤을때는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군단 쪽이 더 큰 전과를 올렸지만, 워낙 의도치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난전이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로인해 전투에서 패배한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자신들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오판하였고, 부하에게 자신을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사실상 군단의 구심점이자, 제대로 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퇴장하면서, 이 싸움은 이미 결론 지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이후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군단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탈영병이 발생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지역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대규모 회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고 한다. 이러한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 유명한 '단테'의 '신곡'에서는 조국을 배신한 죄로 지옥의 맨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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