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카이사르의 숙적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 역사
- 2023. 3. 27.
로마의 청렴결백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카토)는 기원전 95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는데, 기원전 195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大카토)의 증손자로, 이름이 같기 때문에 흔히 '소 카토'로 불리우기도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읜 카토는 외삼촌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집에서 자랐는데, 리비우스 드루수스도 카토가 4살때 암살 당했다. 카토는 어린 시절부터 완고하고 강직한 성격이었으며, 스토아 학파의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평소에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충분한 유산을 상속받았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최소한의 의복만 걸치고 꼭 필요한 만큼의 식사만 하였으며, 시장에서 값싼 포도주만을 사서 마셨다고 한다. 기원전 72년 로마의 노예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였으며, 기원전 67년에는 마케도니아 북부에서 복무하며 군사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기원전 65년 로마로 귀환하여 재무관에 취임하였는데, 전임 공직자들의 비리를 고발하거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집권시절 술라의 부하였던 원로원파들에 의한 공금횡령 등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카토의 그 강직함과 성실한 태도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원로원의 일원이 된 그는 원로원파가 공화정을 수호하는 집단으로 변모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호민관에 당선된 카토는 그 해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함께 '카틸리나의 음모'를 저지하는데 힘을 보탰으며, 음모의 가담자들이 재판없이 처형되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또, 이때 음모의 가담자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목하여 공격하기도 하였다. 카토는 정치적으로 돌출되는 인물들을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공격했는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자, 원로원을 움직여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에 출마하지 못하게 저지하였으며,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할때는, 마찬가지로 원로원을 움직여 개선식을 못하게 하였다. 그후로도 꾸준히 '삼두정치'로 대표되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정치적으로 방해하는데 앞장섰다. 폼페이우스의 토지개혁 시도를 반대했고, 카이사르의 5년 임기의 '갈리아 총독' 부임에 반대하였으며, 키케로가 카틸리나의 음모 사건 처리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당할때도 카토는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기원전 58년에 카토는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부임하는데, 카토의 반대가 계속해서 걸림돌이 되자 합법적으로 그를 로마에서 배제하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2년후에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카토는 계속해서 삼두정치에 반대했다고 한다. 카토는 로마 귀족출신이 아닌 평민출신이었는데, 원로원파에 가담하여 꾸준히 로마 보수 귀족들의 편을 들었다. 카토가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눈에 띄는 인물의 정책을 반대하는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 내전의 초석
기원전 53년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하던 중 전사하면서, 삼두정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이때 카토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를 이간질하여, 폼페이우스를 원로원파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기원전 51년 카토는 집정관 선거에 도전하면서, 부패한 로마 정치권에서 드믈게 청렴한 선거운동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는 로마의 선거가 금품과 폭력으로 얼룩진지 오래 된 영향도 있지만, 카토가 원로원파 보수 귀족들을 대변하면서, 서민들이 원하는 정책을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는 것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토가 원로원파에 가담시킨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카이사르를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정책을 하나 하나 시행시켰다. 폼페이우스와 카토를 중심으로한 원로원파는 카이사르가 내민 정치적 협상을 결렬시켰고, 결국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내전이 시작하기 전에도, 내정 중에도 꾸준히 원로원파와 평화교섭을 시도하였는데, 원로원파는 이 교섭을 번번히 거절하였다. 원로원파의 요구는 실질적으로 카이사르의 정치적, 혹은 물리적 사망이었기 때문에, 내전은 형식적으로 카이사르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로원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카토가 서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에 의하면 카토가 '카이사르에게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다'고 한 술라의 충고를 들었다거나, 카이사르 안에서 독재자를 보았기 때문이라며,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이는 여러모로 생각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로마 공화정의 붕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내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카토에게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승자와 패자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카토는 후방의 시칠리아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으나,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를 탈출하여 그리스로 이동한 이후, 카이사르의 부하인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에게 패배하여, 그리스로 건너간 폼페이우스의 본진인 '디라키움'으로 도주하였다. 기원전 48년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가 승리하였지만, 이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대세가 카이사르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로도스섬 포섭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디라키움에 있던 카토는 패전 소식을 듣고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집트로 도주하여 다시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던 폼페이우스가 배신당해 사망하면서 사실상 내전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기원전 46년 아프리카에서 원로원파와 카이사르 간에 '탑수스 전투'가 벌어졌다. 카토는 이 전투에서 '우티카' 항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전투에서 원로원파가 패배하자, 자신의 모든 가족과 관계자들을 카이사르에게 보내고, 본인은 스스로 배를 갈라 사망하였다고 한다. 내전이후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힌 사람을 카이사르가 사면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동시에 적이기도 했지만 같은 로마의 동지였던 자신이 스스로 보낸 가족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카토의 의도가 옅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죽음을 택함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키케로는 '카토'를 써서 그를 찬양하였고, 이에 카이사르는 '안티카토'를 써서 반박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부패가 만연한 것으로 표현되는 공화정 말기의 로마에서 청렴결백한 모습을 보인 카토는, 사실 그 때문에 이상적인 정치가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이기에 따라 그것은 자신의 부와 권력이 아닌 어떤 정치적 이상에 대한 갈망으로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 더 나아가 그의 정치적 이상이 정말 로마 시민들을 위한 것이었는 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