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암살범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 역사
- 2023. 3. 25.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기원전 기원전 84년, 혹은 기원전 81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친부는 기원전 77년에 집정관을 지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인데, 후에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게 입양되어, 성을 바꾸지 않고 이름 뒤에 그대로 알비누스를 붙였다고 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에 해당되었던 그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치루는 동안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는데, 이때 뛰어난 기량을 보여 카이사르에게 총애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56년에 '베네티족'과의 전투에서는 함대를 지휘하였으며, 기원전 52년에 '갈리아족'의 총 궐기로 '베르킨게토릭스'와 싸울때도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중심으로한 원로원파와의 내전에서도 카이사르의 편에 섰으며, 폼페이우스 일당이 이탈리아를 탈출하여 그리스로 이동하여, '히스파니아'지역을 공략할때는 '마실리아 공방전'에서 함대를 지휘하여 '타우로엔토 해전'에서 승리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내전기간에도 충실하게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하였기 때문에, 법무관에 취임하는 등 요직을 맡을 수 있었고, 기원전 43년에는 '갈리아 키살피나' 지역의 총독자리에 내정되어있었다.
두명의 브루투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암살당하였다.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은 60여명에 달하며, 무려 23번이나 칼에 찔렸다고 한다. 칼에 찔려서 토가 자락을 감고 쓰러지면서 자신을 찌른 사람의 얼굴을 본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너 마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사실 그런 카이사르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고, 후세의 역사가가 각색한 내용이라고 한다. 어찌되었든 당시에 로마에는 유명한 브루투스가 두명있었는데 두 브루투스 모두 카이사르의 암살에 가담하고 있다. 한명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함께 암살이 주범으로 지목되어있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고, 나머지 한명이 바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이다. 실제 카이사르가 저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둘 중 어느 브루투스에게 했는지도 의문이긴 한데,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애인의 아들로,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편을 들어 카이사르에게 적대했음에도 패배 후 이례적으로 여러 공직에 임명되는 등 카이사르의 호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갈리아 전쟁시기부터 꾸준히 카이사르와 함께했기 때문에, 어느 브루투스에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의 두 브루투스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공화제을 지키기 위한 고결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마의 적을 단죄하는 포지션이라고 하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의 공범 정도의 취급이다. 유명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도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등장인물 '브루투스'로서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자, 저 유명한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의 주인공인데 반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그 이름마저 '데키우스'로 잘못 쓰여져 있다. 혹은 여타 이유로 셰익스피어에 의해 개명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에 대한 이런 취급이 이해가 가는 면도 있는데, 암살 전까지 카이사르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승승장구하던 데미쿠스 브루투스가, 갑자기 카이사르를 암살하는데 가담한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암살이후에 공개된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의하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후계자 2순위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유언을 들은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암살과 몰락
카이사르의 암살범들은 카이사르만 죽으면,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던 때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암살에 동조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당장이라도 폭도로 변한 것 같은 분위기 였다. 특히나 다른 암살범들과 다르게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사실상 카이사르의 은혜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구심점인 카이사르가 없어지자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카이사르와 공동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중재로 로마를 벗어나 몸을 피하였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예정되어있던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곧 카이사르의 후계자리를 둘러싼 혼란이 벌어졌고, 집정관 자리에서 내려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자리를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싸움을 벌였다. 전투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추격해온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승리로 끝났지만, 카이사르의 암살범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설자리는 없었고, 그의 군단 병사들 조차 카이사르의 암살범과 함께 할 수 없다며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류하였다고 한다. 이에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다시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하려 하였는데, 전투에서 패배해 히스파니아로 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손 잡고 재기하여 갈리아 지역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엔 '마케도니아'의 총독으로 부임한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합류하기 위해서 이동하였는데, 도중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력하던 갈리아 부족에게 붙잡혔고,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그는 카이사르의 암살범 중 가장 처음으로 처벌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