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일의 유명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역사
- 2023. 3. 18.
로마의 명문 귀족 율리우스 가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의 명문 귀족인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리우스 가문은 원래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난 '알바롱가'의 귀족으로, 로마가 왕국인 시절 로마의 3번째 왕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통치시기에 알바롱가가 로마로 편입되면서 로마의 일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율리우스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시조를 '베누스'(아프로디테)와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율루스'라고 주장하였는데, 율루스는 바로 알바롱가를 세웠으며, 로물루스와 레무스도 혈통상 율루스의 자손이 된다. 물론 이것은 율리우스 가문의 주장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로마에서 로마의 시조와 자신들의 시조가 한 핏줄이라는 주장을 하고도 빈축을 사지 않은 것을 보면, 율리우스 가문이 로마에서 갖고 있는 정통성의 깊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집정관을 여럿 배출하는 등 통치의 중앙 무대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정치적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어있었다. 또한 로마는 확장을 계속해 나감에 따라 필요에 의해 평민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졌는데, 평민 계층에서 부를 쌓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함에 따라, 신흥 평민 귀족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율리우스 가문은 사실상 몰락 귀족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법무관을 역임하고, 아시아 속주의 총독이 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매형이 되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이 작용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민파와 원로원파의 갈등
카이사르가 태어났을때 로마는 이미 평민파와 원로원파로 나뉘어 정치적 싸움을 버리고 있었다. 로마는 공화정으로 두명의 집정관을 두어 직접 정책을 시행하였지만, 실제로는 의회에 가까운 형태의 원로원이 있어, 정책의 입안과 실행 등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원로원은 로마의 귀족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귀족들은 사실상 원로원 의원으로 여러 특권을 누리며, 자신들의 가문의 기반을 이용해 로마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원로원 의원, 귀족들을 중심으로 로마의 전통과 귀족 중심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원로원파이다. 반대로 평민들은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의 특권을 제한하고, 평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하여 '호민관'을 중심으로 평민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였는데, 주로 평민 출신자들 중심으로 일부 귀족들이 평민파로서, 호민관 특권을 이용하여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파벌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한창이었던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삼촌에 해당하는 집정관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법'을 제정하면서, 두 파벌의 싸움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법안의 내용 자체는 이탈리아 내부의 동맹도시의 시민들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는 동맹시 전쟁을 종결시키고, 이탈리아 내부를 로마로 결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대량으로 늘어나게 된 새로운 로마의 평민들을 둘러싸고, 평민파에서는 이들의 숫자와 영향력을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이용하려고 하였고, 원로원파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로마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봉쇄하여 축소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평민파로 대표되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원로원파로 대표되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로마는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기원전 82년에 술라와 원로원파가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평민파 인물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하게 되었다. 이때 카이사르도 숙청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였는데, 카이사르 본인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은 없지만, 카이사르는 평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기도 했고,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루는 동안 로마에서 술라를 적대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가 카이사르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한때 술라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으나 주변의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지만, 카이사르는 아내와 이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목숨의 위험을 느껴 로마를 떠나서 잠적했는데, 이때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대기만성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를 떠나기 전에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 터라, 로마의 하층민들이 사는 곳의 평범한 집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아직 평민파에 의한 반란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이에 동조하지 않고, 변호사 생활을 하였으며, 이때 로마 유명한 연설가이자 변호사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법정에서 대적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부패로 악명 높은 정계의 거물들도 가차없이 고발하며 명성을 얻었는데, 돌연 수사학 공부를 하기 위해 그리스의 '로도스'로 유학을 갔다. 카이사르가 유학을 떠나던 길에 해적에게 사로잡힌 이야기는 유명한데, 몸값을 받기 위한 전리품 처지로 목숨이 해적들 손에서 왔다갔다하는 한중간에도, 카이사르는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해적들이 자신의 몸값을 적게 불렀다며 더 올리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해적들은 이런 카이사르를 정신나간 유쾌한 사람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는 포로의 몸이었음에도 해적 소굴 내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돌아다닌 것 같고, 해적들 사이에서 시를 낭독하거나, 해적들을 협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카이사르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에, 함대를 모아 해적을 소탕하였으며, 자신이 낸 몸값을 포함하여 해적들이 모은 재물을 되찾아왔고, 잡힌 해적들을 모두 처형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74년에는 사비로 군대를 모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참전하여 아나톨리아 지역의 도시들을 돕기도 하였으며, 기원전 73년에는 로마로 돌아와서 선거를 통해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에 당선되었는데, 이때부터 로마에서 '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부르는 명예로운 경력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 시기에 로마에서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이라고 불리우는 노예 반란이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카이사르도 군단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이미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의 구성원이자 라이벌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히스파니아'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종식시킨데 비해, 카이사르는 별다른 성과를 낸 적이 없었다. 기원전 69년 카이사르는 재무관에 선출되었는데, 이 해에 고모이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와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이자 아내인 코르넬리아가 사망하였다. 카이사르는 장례식을 주관하면서, 자신이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정치적 유지를 이어 평민들을 대변할 것을 선언하였는데, 두 사람의 죽음으로 사실상 평민파와의 직접적인 연결이 끊어지는 것으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의 상실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으며, 기원전 67년에는 로마로 돌아와서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 이는 전면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평민파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에 기대면서, 뒤에서는 원로원파인 술라의 손녀와 결혼하면서 원로원파의 직접적인 견제를 방지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로마에서는 법과 절차를 지켜야 했지만서도, 원로원에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발을 통해 정치적, 혹은 물리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발언이나 행동을 할때는 상당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공직 경험을 쌓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즉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행사를 주최하는 등 돈을 뿌려댔고, 크라수스를 포함하여 여러 인사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삼두정치
카이사르는 최고 신관을 거쳐 법무관에 당선되는 등 차근차근 공직 경험을 쌓아나가서,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의 총독에까지 임명되었다. 총독이 된 그는 히스파니아 지역의 이민족을 정복하였고,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내서 현지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59년 41세의 나이로 카이사르는 로마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사실 이 집정관 자리는 원로원파의 견제를 받고 있던 카이사르로서는 혼자 힘으로 쟁취할 수 없었는데, 그 뒤에는 삼두정치로 대표되는 정치연합체가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고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다른 원로원 의원들의 견제로 그 정치적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든 폼페이우스와 로마 제일가는 부자로 엄청난 재산을 가졌지만, 두드러지는 공적이 없는데다 시민들에게 인기도 없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재산만큼 발휘하지 못하는 크라수스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가진 명성과 반대로 로마 정치계에서 비주류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두 사람에게 접근하였다. 폼페이우스는 동방 원정을 마친 자신의 군단 병사들의 퇴역의 대가로 줄 토지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크라수스는 당면한 정치적 과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명예로운 공적을 세우기 위한 기회를 얻기를 갈구하고 있었다. 또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편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 둘 사이를 중재하여 서로의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정치 연합체를 구성하였고, 이를 삼두정치라고 한다. 원로원에서는 평소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비밀회합에 대해 짐작도 하지 못하였고, 카이사르는 두 사람의 도움을 얻어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 정치 연합을 공고히하기 위하여 딸을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고, 집정관이 되자 폼페이우스를 위한 농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농지법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으로 대표되는 내용이었는데, 대지주들이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국유지를 환수하여 무산자나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법안은 원로원에서 강한 반대를 받았는데, 그 대지주들이나 혹은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자들이 바로 원로원파 원로원 의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로마로 모여서 반대자들을 위협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지지자들도 반대자들을 포룸에서 강제로 쫒아내기도 하였다. 또 크라수스의 재력이 이를 뒷받침하였고, 그를 지지하는 부유한 평민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이 된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임기내내 거의 집에 틀어밖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로마에서는 이를 가리켜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에 해당하는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 광장에 붙여서 공개하고, 공직에 있는 자는 일정 금액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며, 속주세 예납제를 폐지하는 등 세법 개혁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임기 후에는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는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의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고발당하여 처분될 위험이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집정관에서 물러나자 빠르게 자신의 임지로 떠났다. 카이사르의 총독 임지는 '일리리아'(발칸 반도의 서북부)와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남의 북 이탈리아)였는데, 이후 갈리아 트란살피나(지중해 인근 프랑스 남부)까지 더 해져서, 총 4개의 로마 군단을 거느릴 수 있었다. 이렇게 넓은 지역의 여러 속주의 총독을 겸임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카이사르는 이미 갈리아 정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뿐만아니라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5년이 보장되었으며, 전쟁 중 추가로 5년을 더 보장받았다. 이 임기 연장의 대가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에 동시에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며, 임기후에는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 속주의 총독 자리를 보장받았다. 또 카이사르는 전쟁 도중에 2개 군단을 더 편성하여 6개 군단을 운영하였으며,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카이사르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사실상 야만의 땅에 가까웠던 갈리아 지역을 평정하면서, 수많은 '갈리아족', '게르만족'과 싸웠으며, 배를 타고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원정을 진행하여, 영국이 최초로 역사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갈리아 전쟁을 통해 로마의 문화는 서유럽으로 전파되었고, 갈리아 지역이 로마의 속주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이 전쟁으로 현대 서유럽의 기초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입지도 완전히 바꾸어 버렸는데, 겨우 7년 많에 엄청난 면적의 갈리아를 평정한 사건은 로마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이미 카이사르의 입지는 폼페이우스와 맞먹거나 혹은 능가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크라수스와 다른 사람들에게 진 빚도 모두 갚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전쟁을 수행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갈리아 전기'라는 책으로 서술하였는데, 특유의 간결하고 우아하면서 함축적인 문체로 지금도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
그러나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는 사이에 로마의 정치 구도는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던 크라수스는 전공을 서둘러 '파르티아'를 쳐들어 갔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도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렸다. 이렇게 삼두정치가 해체된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사실상 카이사르의 영향력이 이미 삼두정치의 영향력을 대체하고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카이사르는 아무런 면책권이나 군사적 권한이 없는 무방비 상태로 로마로 돌아가게 되면 고발당하여 정계에서 축출될 것을 우려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사실 원로원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갔다면, 잘해야 추방형이고 잘못되면 처형되어, 정계에서 완전히 숙청되었을 것이다. 이에 카이사르는 여러방면으로 원로원과 교섭하려고 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기원전 49년에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여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의 혐의로 고발하였다. 결국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1월 12일에 1개의 군단만을 이끌고 '루비콘 강'(당시 로마의 이탈리아 북부 경계선)을 넘게 된다. 이때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유명한데, 후에 카이사르 본인이 쓴 '내전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아니고, 후에 역사가들이 덧붙인 내용으로 보인다. 카이사르의 군단은 로마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로마 시민들을 카이사르의 편을 들었고, 지나가는 도시들은 카이사르 군단을 맞아들여, 별다른 싸움없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고 한다. 그 사이에도 카이사르는 끊임없이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어 회담을 통해 해결하자는 의지를 피력하였는데, 이를 거부한 폼페이우스와 상당 수의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를 떠나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폼페이우스 진형에서 카이사르를 방해하기 위하여 주민들을 선동하거나 군사를 모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계속 실패하였고, 카이사르는 붙잡힌 폼페이우스측 인물들에게 죄를 묻지않고 풀어주면서 자비를 베풀었다. 이미 몇번이나 내전을 겪어본 로마에서 제대로 된 싸움없이 영향력만으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가 대항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탈출하여, 자신의 영향력이 충분한 그리스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내전은 장기화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자신의 영향권 안에 있는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역을 제외한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그리스 그리고 동방 지역까지 하나하나 제압해야 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 그리스의 '테살리아' 인근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내전에서 승기를 잡았으며, 폼페이우스는 이집트까지 도주하였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살해당하면서 내전이 끝나게 된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쫒아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하면서 이집트의 권력투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내전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기원전 45년에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문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인데, 이로서 폼페이우스파의 잔당 세력이 완전히 격파되었다.
카이사르의 개혁과 종신 독재관
내란이 거의 마무리된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귀환하여 임기 10년의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로마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공고해진 카이사르는 로마의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는데, 먼저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로마의 속주가 된 갈리아 지역의 유력자들을 대거 원로원 의원으로 포함시켜, 기존의 정원 600명이었던 원로원을 900명까지로 확대시켰다. 그리고 원로원 최종권고를 완전히 폐지하여, 원로원 의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특정 인물을 숙청하는 것을 방지했다. 이는 사실 원로원파가 자초한 결과 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하여, 많은 로마의 개혁 법안을 좌초시켰으며, 이로인해 로마를 실질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중소 자영농민들과 로마 군단의 병사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이러한 폐단을 근절시키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더 공고히하기 위하여 개혁을 단행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원로원의 약화는 특정 정치인들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자신이 정복한 갈리아 지역만큼 넓어진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공직자들의 숫자를 늘리고, 사법을 계혁하여 재판을 통해 처벌 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사형을 폐지하고 추방형으로 갈음하게 하였다. 그리고 로마에 치안대를 신설하여, 비록 자신도 했던 방법이긴 하였으나, 폭력사건을 일으켜 정적을 배제하지 못하도록 견제할 수 있게 하였다. 카이사르가 행한 개혁 중에 특히 유명한 것 중에 하나는 달력을 개정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게 하는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는데, 이는 이후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수정되어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또 계속 늘어나는 로마 시민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로마 재개발을 시행하였는데, '카이사르 포룸'을 건설하고, 여러 공공 건축물들을 축조하였다.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이 이때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의 성벽인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여 로마 도시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외에도 늘어난 영토에 따라 속주를 개편하고, 실업자나 무산자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시행하였으며, 교사와 의사 등 로마에 필요한 인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지급하도록하고, 늪지를 개척하고 항만을 재정비 하는 등 많은 정책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런 개혁들을 반대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클레멘티아와 암살
카이사르가 많은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가 클레멘티아(관용)를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이사르가 치른 내전은, 이전에 몇번 있었던 내전과 달리 최소한의 희생으로 치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카이사르는 항복하거나 붙잡힌 적들을 용서해주었으며, 전투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기는 희생을 제외한 희생은 최대한 줄일려고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과장되었을 수는 있으나,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 중에 내란을 거치고도 많은 사람이 로마에서 살아있었던 것을 보면 어느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당시 로마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에, 현대의 국가처럼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닌, 도시국가의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같은 나라의 구성원끼리의 싸움은 어느 쪽이 승리하는 좋은 이미지로 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관용적인 행동은 충분히 동의할 만 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발표하기 위해 원로원에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결국 원로원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하여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암살 당했는데, 총 23번 칼에 찔렸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많이 있지만, 그 진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카이사르가 행한 개혁의 내용들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카이사르의 암살에는 기존의 정치적 반대자들 뿐만 아니라 한때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카이사르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아무도 카이사르의 죽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는 이미 사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기 때문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가 공식적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암살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의해 공화정의 로마는 몰락하고, 로마 제국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카이사르의 본래 의도였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