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대왕」
- 역사
- 2023. 3. 17.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노려진 아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132년 '폰토스 왕국'의 수도인 '시노페'에서, 폰토스 7대 국왕인 '미트리다테스 5세'의 아들로 테어났다. 어머니는 '라오디케'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의 딸이었다고 한다. 폰토스 왕국은 흑해에 인접한 아나톨리아 지역에 있는 나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그의 후계자중 하나인 '미트리다테스 1세'가 왕국을 세웠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짙게 계승한 곳이었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차기 국왕으로서 교육을 받아왔다는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미트리다테스 6세가 15세 무렵, 아버지인 미트리다테스 5세가 참석한 연회에서 암살당하였는데, 아내인 라오디케와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6세와 '미트리다테스 크레스투스'가 공동을 통치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라오디케가 통치하였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 이지만, 어머니인 라오디케는 미트리다테스 6세보다 크레스투스를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미트리다테스 6세는 궁정을 탈출하여 수년간 숨어지내면서 실력을 길렀다고 한다. 기원전 116년 즈음 다시 폰토스로 돌아온 미트리다테스 6세는 어머니와 동생을 축출하고 왕좌를 다시 차지하였으며, 어머니와 동생은 얼마 안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미트리다테스 대왕
미트리다테스 5세가 사망한 이후 폰토스 왕국은 '파플라고니아'가 독립하고, '프리기아'를 로마에 빼앗기는 등 국력이 쇠퇴하여 흑해 연안의 약소국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야심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는데, 그는 흑해를 중심으로 폰토스의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넓혔다. 먼저 '콜키스' 등 흑해 서쪽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스키타이족'을 견제하여 흑해 북쪽의 현재 우크라이나 남부에 해당하는 '보스포로스 왕국'과 '크리미아' 등을 수중에 넣었다. 또 흑해 서쪽의 '트라키아'인을 격파한 뒤 '올비아' 등을 영향권 안에 둠으로서, 흑해 인근 전체 지역에서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흑해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흑해 연안이 어느정도 평정되자 눈을 아나톨리아 반도로 돌려서, 기원전 104년에는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3세'와 협의하여 '파플라고니아'를 분할하는 등 영토 야욕을 놓지 않았으며, 이러한 와중에 로마와 갈등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트리다테스 6세의 성공적인 정복활동으로 폰토스의 위상은 크게 올라 가히 대왕의 칭호에 걸맞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116년경 '카파도키아 왕국'의 '아리아라테스 6세'가 사망하자, 아리아라테스 6세의 아내이자, 미트리다테스 6세의 누나였던, '카파도키아의 라오디케'와 어린 두 아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원전 102년에 니코메데스 3세가 카파도키아를 침공하여 점령하였고, 라오디케와 결혼하여 카파도키아 왕국을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트리다테스 6세가 대군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비티니아 군을 몰아내고, 자신의 조카인 '아리아라테스 7세'를 왕위에 앉혔다. 이 사건으로 폰토스와 비티니아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는데, 서로 카파도키아 왕국의 실권을 손에 넣기 위해 싸웠고,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로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 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니코메테스 3세를 몰아넣었지만, 로마는 어느쪽도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고,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에서 철수하도록 하고, 카파도키아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새로운 왕으로 하였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러한 불합리한 로마의 요구에도 순순히 응했는데, 당시에 그는 로마를 적으로 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이후 로마에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여 혼란해지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 틈을 타고 다시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 기원전 91년경 비티니아를 칭공한 미트라다테스 6세는 새로 집권한 '니코메데스 4세'를 몰아내고,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왕으로 내세웠으며, 카파도키아도 쳐들어가서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폐위 시키고, 영토를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에 로마는 다시 사절을 보내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했으며,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요청도 받아들인 것 같다. 기원전 89년에는 니코메데스 4세가 폰토스를 공격했는데, 이는 니코메데스 4세에게 배상하라고 한 로마의 요구를 미트리다테스 6세가 거부하자, 로마에서 니코메데스 4세에게 폰토스를 공격하도록 사주한 것으로 보인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행위에 대해 로마에 항의하였고,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요구를 해오는 로마와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비티니아 군대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이끄는 폰토스 군대에 대패하였고,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의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와 합류하였지만, 프로토파키움 요새에서 다시 폰토스 군대에 패배하였다. 상황이 여이치 않자 니코메데스 4세와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를 포함하여 로마의 지휘관들을 사방으로 도주하였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여세를 몰아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에 군대를 보내어 폰토스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로마의 영향력을 없에기 위해 로마와 이탈리아인 8만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자칭하며, 로마로부터 그리스인들을 해방시키겠다고 선포하며, 그리스계 도시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곤 로마가 동맹시 전쟁을 완전히 마무리하는 동안 그리스 지역의 도시들도 포섭하였다. 로마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집정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지휘권을 주어 원정을 떠나게 하였지만, 평민파와 원로원파의 갈등 속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그 지지자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결국 술라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으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를 탈출하여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도망하였다. 술라는 무력을 이용하여 로마를 제압하고, 원로원과 로마 도시를 진정시킨 후에 그리스로 출발하였다. 기원전 86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한 '아테네'를 제압한 술라는 무거운 벌금을 매긴 후에 군단을 이끌고 북상하였는데, '카이로네이아'에서 폰토스의 군대와 맞붙었다. 로마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폰토스의 군대는 12만명에 달했고, 술라의 로마 군단은 4만명 규모였는데, 폰토스의 군대는 로마 군단에 패배하여 뿔뿔히 흩어졌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폰토스 군의 전사자는 11만명이고 로마 군단은 12명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기 때문에 승패의 사실을 제외한 부분은 가히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이러한 중에 로마에서는 집정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술라의 정책을 뒤집고 원로원파를 몰아내었고,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지휘관으로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하기 위한 새로운 정규 로마 군단을 편성해서 보냈다. 술라의 군단과 플라쿠스의 군단은 어찌되었든 같은 로마 군단이었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을 피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빨리 잡아서 전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술라의 군단은 사실상 로마에서의 지원이 끊겼지 때문에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면서, 로마에 등을 돌렸든 도시들을 위협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플라쿠스의 군단은 육상을 이용해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쳐들어갔고, 술라는 부관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함대를 모집하게 시켜 폰토스의 해군을 섬멸하고, '에게해'의 섬들을 공략하면서 그리스 일대에서 폰토스의 영향력을 배제하였다. 입장상 반목하고 있는 로마 군단이었지만, 나름 잘 연계된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플라쿠스의 군단은 미트리다테스 6세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지만, 함대가 없었기 때문에 흑해를 통해 도주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이 소식을 들은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접촉하여 평화협상을 하였다. 막대한 배상과 함대를 넘겨 받는 대신 전쟁을 끝내기로 한 것이다. 이후 술라는 플라쿠스의 군단을 흡수하고, 전쟁동안 얻은 군자금과 함대를 이용하여, 다시 한번 로마로 진군하였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전쟁 패배로 인해 국내에서 떨어진 자신의 영향력을 다시 확보하려고 하였다. 또한 용병을 고용하고, 군대를 개편하는 등 손실된 병력을 복구하는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자 일부 지역에서는 과중한 세금 등을 이유로 반란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불온한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신경을 썼다. 이러한 과정에서 폰토스 군의 지휘관이었던 '아르켈라오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의 의심을 받자, 로마 군단에 귀순하였다. 아르켈라오스는 술라가 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남겨 놓은 로마 군단의 지휘관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를 공격하려한다며, 로마가 먼저 폰토스를 공격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무레나가 공적을 세우기 위해 무단으로 폰토스 국경 마을을 약탈하면서 다시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에 평화협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기원전 82년 무레나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폰토스를 약탈했다. 술라는 로마에서 무레나에게 협정을 지키도록 명령했다고 하는데, 무레나는 로마에서 온 사절 앞에서는 이를 수긍하였지만, 사절이 떠나자 곧 다시 적대행위를 계속하였다. 혹은 뒤로 술라가 계속 폰토스를 괴롭히도록 명령했다고도 한다. 무레나의 로마 군단은 이전의 전쟁에서 폰토스 군대에 계속 승리했기 때문에 얕보고 있었는데,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를 급습하여 무레나의 군단을 패배시키고, 카파도키아에서 로마 군단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이에 로마에서는 다시 카파도키아로 사절을 파견하여 카파도키아와 폰토스 사이를 중재하였다. 로마 군단을 패배시킨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다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일부 회복하였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83년경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장녀 '클레오파트라'를 '아르메니아'의 왕 '티그라네스 2세'와 결혼시켜,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의 사주로 아르메니아는 카파도키아를 침략하였으며 크게 승리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다시 양성하면서,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로마의 평민파 반란군인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그를 원조하여 로마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될 수 있게 하였다. 혹은 반대로 세르토리우스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아나톨리아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기로 약속하고, 혼란을 유발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기원전 74년에 니코메데스 4세가 사망하였는데, 후계자가 따로 없던 그는 비티니아 왕국을 로마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루아침에 눈앞의 비티니아가 로마의 속주가 되어버린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가 비티니아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유언을 조작했다고 비난하였고, 이것은 곧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비티니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폰토스의 대군을 상대할 수 없어 후퇴하였고, 비티니아는 곧 폰토스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 미트리다테스 6세는 '칼케돈'을 공격하여 로마의 함대를 파괴하였고, 비티니아 일대를 공격하면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다시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이에 로마에서는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지휘관으로 군단을 파견하여 폰토스를 상대하게 하였다. 미트리다테스 6세의 폰토스 대군은 '키지코스'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인근의 방어에 적합한 위치에 숙영지를 세우고, 보급을 차단하며 폰토스군을 견제하였다. 기원전 73년 결국 보급이 끊어진 폰토스군은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였는데, 로마 군단을 피하기 위해 밤에 이동하였기 때문에, 강을 건너는 도중에 많은 숫자가 희생되었으며, 이후 로마 군단의 추격을 받아 또 많은 병사를 잃었다. 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막대한 손실을 입기도 하였다. 기원전 72년에는 '카비라'에서 맞붙었는데, 한때 폰토스군이 우세한듯 했지만, 결국 로마 군단에게 패배하였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잔존 병력과 함께 아르메니아로 도망쳤다. 폰토스의 수비대는 대거 로마에 항복하였고, 폰토스를 정리한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를 로마에 넘기도록 요청했지만 거부당하면서, 아르메니아와 로마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기원전 69년 아르메니아로 진격한 로마 군단은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티그라네스 2세에게 대승하였다. 이에 티그라네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6세는 '파르티아'에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기원전 68년에는 다시 '아르탁사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또 로마 군단이 승리하였고, 아르메니아 군대는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르메니아 밖에 있었던 로마 군단은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풍족한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약탈하기로 하였고,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휘하의 군단들도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 보다는 아르메니아의 도시들을 약탈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기원전 67년 루쿨루스의 군단이 아르메니아 약탈에 집중하는 동안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폰토스로 돌아갔다. 그는 곧 폰토스의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단이 루쿨루스의 군단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를 요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폰토스를 다시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다시 폰토스로 이동하여 전쟁을 끝내려 하였으나, 이미 전쟁에는 관심없는 병사들은 이를 거부했다. 루쿨루스의 군단은 어쩔 수 없이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였고, 티그라네스 2세도 다시 아르메니아로 돌아와서 세력을 수복하였다. 원정에 파견된 군단이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자, 기원전 66년 로마에서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동방 원정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매우 불만스러웠지만 군단의 병사들이 이미 자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마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군단을 인계받자마자 막대한 금액의 돈을 병사들에게 주어 그들의 환심을 사고, 지휘권을 확립했다고 한다. 폰토스를 되찾은 미트리다테스 6세였지만, 로마 군단에 대항할 만한 힘은 없었기 때문에 산맥 깊숙히 후퇴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폰토스의 요충지를 차례차례 함락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버티기 어려웠으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망명을 거부하였고, 폼페이우스에 의해 폰토스와 동맹을 끊고, 사실상 로마의 종속국가로 로마와 동맹 맺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계속해서 미트리다테스 6세와 협력하는 나라들을 차례차례 공략하였고, 기원전 64년에 아들인 '파르나케스 2세'까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배반하자, 절망에 빠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독을 삼키고 나서 자신을 죽이도록 부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결국 한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자칭하던 폰토스의 대왕은 로마에 몰려 몰락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 6세의 시신을 시노페에 있는 왕실 묘지에 매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파르나케스 2세는 폰토스의 왕위를 이을 수는 있었으나, 폰토스는 다시 흑해 연안의 약소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