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카이사르의 암살 주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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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파르티아 원정과 첫번째 배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85년에 태어났다. 유력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유명한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53년 시리아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밑에서 재무관을 지낸 것이 첫 공직생활인데, 이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실시 할때 함께하였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크라수스에게 너무 적진 깊숙이 진격하지 말 것을 진언 하는 등 군사적 조언을 하였으나, 크라수스는 그의 조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카르헤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로마 군단은 파르티아 군대에 대패하고,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 모두 전사하였다. 이때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전세가 기울자 500명의 기병과 함께 도주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가 크라수스를 배신하고 도망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도망쳐온 생존한 로마 군단의 패잔병 1만명을 수습하여, 파르티아 군대의 역습을 막았다는 것을 보면, 그가 상황에 맞는 적절한 판단을 한 것 일 수도 있다. 또한 그는 군사적으로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내전과 두번째 배신

기원전 50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생기자,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원로원파의 일원으로 폼페이우스와 함께하였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원로원파에 가담한 것은 그의 정치적 신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시리아 지역에서 있었던 문제로 인해 재판을 받게 생겼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음에도 원로원파의 대응은 지리멸렬했고, 결국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이탈리아를 탈출하여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그리스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와 합류한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48년 원로원파 군단의 함대를 지휘하여 '시칠리아'에 있는 카이사르의 군단을 공격하였고, 계속해서 지중해 일대에서 카이사르 군단을 괴롭혔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원로원파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도망쳤다가,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카이사르에게 무조건 항복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협조하기로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도망쳤다가, 결국 배신당하여 살해되었다. 일부 원로원파 의원들은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도주하여 계속 카이사르에 저항하였으나,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카이사르 밑에서 지휘관이 되어 당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내전에 참전하기도 하였고, 이후에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2세'와의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그러나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원로원파의 잔당들과의 싸움은 거부하였고, 로마로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카이사르는 항복하는 사람들을 모두 사면해 주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사실상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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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배신과 최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중이었던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였다. 이 암살에는 60여명의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남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이 암살을 진행하였는데, 실제 그들이 어떤 의도로 혹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암살을 결행했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암살범들의 의도와 다르게 로마 시민들은 암살에 동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카이사르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제대로 된 명분도, 실력도, 재력도 없었던 그들은 흩어져버렸고, 주범인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당시 집정관이자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주선으로 시리아 속주의 총독 부임하여 도망치듯 로마를 떠났다. 이후 '제2차 삼두정치'가 수립되고 카이사르의 복수가 실행될것이 명확해지자, '마케도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군대를 모아 그리스 지역에서 저항하였다. 기원전 42년 마케도니아 동부에서 벌어진 '필리피 전투'에서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의 구도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의도한 전투라기 보다는 대치중에 이루어진 난전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군단은 졌지만,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군단은 승리하였고,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카시우스 롱기누스 측이 유리한 상태였다. 그러나 워낙 난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자신의 군단이 패배하고, 원래 자리에 있어야할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군단이 보이지 않자, 패배를 직감하고 부하를 시켜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전세를 관망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바꼈을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로마 공화정에 최후의 쐐기를 밖은 채로 운명을 달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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