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로마 시민에서 지배자로 로마 공화정은 왕이나 참주같은 권력을 독점하고, 국가를 마음대로 다스리는 인물이 나타나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다. 이는 비단 로마 통치의 한부분을 담당하던 원로원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들 자체의 거부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표면적으로는 '첫번째 로마 시민'(Princeps Civitatis)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황제에 의한 통치가 계속되면서, 점차 시민들은 황제들을 지배자를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인식개혁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긴 했지만, 황제들은 계속해서 기존의 정치체제를 답습하였고, '원수정'(Principatus)의 형태가 계속되었다...
고대 로마의 프린켑스 '프린켑스'(Princeps)는 '가장 앞서는', '제일인자'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이는 로마가 공화정이던 시절부터 쓰이던 말로, 프린캡스와 로마 원로원을 뜻하는 '세나투스'(Senatus)를 합쳐 '프린캡스 세나투스'라고 하여, 유력한 원로원 의원에 대해 일종의 원로원 명예 의장같은 칭호로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프린캡스 칭호는 중세에 쓰인 프린스(Prince)의 어원이 되었다. 로마의 첫번째 황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기원전 44년 로마의 최고권력자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통해 정식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고, 후에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
카이사르의 후계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기원전 63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옥타비우스가 태어났을때 아버지가 점성술사에게 아이를 들에 버리라는 점괘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그냥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옥타비우스의 집안은 본래 로마 근교의 소도시 '벨리트라이'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로마 시내의 인구가 늘어 혼잡해지자 어린 옥타비우스는 벨리트라이로 이사해 거기서 자랐다고 한다. 옥타비우스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옥타비우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에서 엄청난 인기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옥바티우스는 카이사르와 혈연인 점도 있었기 때문에, 카이..
출세길이 막힌 귀족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로마의 유서깊은 '아이밀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로, 그와 같은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평민파와 원로원파의 사이의 갈등에서 원로원파에 가담하였으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휘하에서 참전하기도 하였고, 술라가 독재관이던 기원전 78년에는 집정관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평민파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당시 대표적인 평민파 호민관 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딸과 결혼하기도 하였다. 결국 기원전 77년에 일어난 에트루리아 시민들의 반란에 동조하였다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진압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왼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는 기원전 68년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에트루리아 출신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군사적인면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활약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오른팔로 취급된다면, 마이케나스는 외교와 문화적인 부분에서 활약하여 황제의 왼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케나스가 언제 아우구스투스와 만나게 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로 생각되어진다. 마이케나스는 일반적인 로마인들이 단계를 밟아 공직 경험을 쌓는, 이른바 '쿠르수스 호노룸'을 거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법무관이나 집정관 같은 공직을 추구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실하여, 그의 개인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보조자로서 아우구스투스를 보좌..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 고대 로마 공화정은 현대의 의회 민주주의의 시조라고 생각되고 있어, 상원을 영어로 'Senate'라고 하는데, 이는 원로원을 뜻하는 라틴어 'Senatus'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원로원은 로마의 시작과 함께 탄생하여, 사실상 운명을 함께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정도 인데, 그 성격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다. 본래 원로원은 로마 왕국에서는 정책 결정권이 없는, 왕의 자문 기관적인 성격을 가진 귀족 회의체였다. 물론 로마 왕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왕국과는 다르게, 혈연을 중심으로 왕권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 로마에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가 왕으로 추대 되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그 중심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기원전 64년에서 기원전 6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평민 출신인데 소위 평민 귀족을 뜻 '노빌레스' 출신이 아닌, 일반적인 평범한 평민 출신으로 생각되어 진다. 이 때문에 젊은 시절이나 출신 가문에 대한 내용은 알기 힘들다. 아그리파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직접, 후에 자신의 후계자가 되는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를 주선해 주었는데, 여기에서 아그리파가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 복무를 했으며, 카이사르와 아그리파가 '클리엔텔라' 관계로 묶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가 허약한 체질에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젊지만 재능이 있는 아그리파를 눈여겨보고, 두사람이 친구가 될 수 ..
제2차 삼두정치의 붕괴 기원전 38년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연합체인 '제2차 삼두정치'가 '타렌툼'에서의 협정으로 인해 5년 연장되었지만, 실상은 레피두스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의 상당부분을 상실하여 회담에 참가조차 못 하였으며, 사실상 본격적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정치적 영향력 싸움을 연장시키는 정도의 역할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레피두스가 완전히 실각하게 되었고, 안토니우스는 동맹을 공고히하기 위해서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하고 있었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와 혼인하면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기원전 69년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 기원전 323년부터 이집트의 총독이 되었으며, 기원전 305년에는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군림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계로 생각되어진다. 또한 이집트의 지배자인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서서 통치하였기 때문에,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지독한 근친상간을 계속해왔는데, 아울레테스도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혹은 6세)와 결혼하여 왕가를 유지하였다. 또 프톨레..
카이사르의 먼 친척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83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그의 할아버지가 기원전 99년에 집정관을 지내면서, 어느정도 로마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뛰어난 웅변가로 명성이 있었던 할아버지는 기원전 8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했을때,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인 '율리아 안토니아'인데, 안토니우스가 아직 아이 였을 때 남편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이었는지, 안토니우스는 젊었을때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기원전 63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함께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는 안토니우스..
평민 출신 변호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이탈리아 반도 내의 '아르피눔'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아르피눔의 유력자의 아들로, 그 재력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어렸을때부터 로마에서 수사학이나 웅변술 등 여러 교육을 받았으며 자랐다. 기원전 91년부터 로마에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참전했던 것 같은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복무 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폼페이우스와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기원전 88년 이후부터 평민파와 원로원파가 내전을 겪는 동안은 그리스 지역의 아테네나 로도스 등지에서 유학하면서 학문에 힘썼고, 이때 아테네에서 평생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티투스 폼포니..
로마의 청렴결백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카토)는 기원전 95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는데, 기원전 195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大카토)의 증손자로, 이름이 같기 때문에 흔히 '소 카토'로 불리우기도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읜 카토는 외삼촌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집에서 자랐는데, 리비우스 드루수스도 카토가 4살때 암살 당했다. 카토는 어린 시절부터 완고하고 강직한 성격이었으며, 스토아 학파의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평소에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충분한 유산을 상속받았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최소한의 의복만 걸치고 꼭 필요한 만큼의 식사만 하였으며, 시장에서 값싼 포도주만을 사서 마셨다고 한다. 기원전 72년 로마의 노예 검투사들이 반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