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전기의 정치형태 「프린키파투스」
- 역사
- 2023. 4. 11.
고대 로마의 프린켑스
'프린켑스'(Princeps)는 '가장 앞서는', '제일인자'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이는 로마가 공화정이던 시절부터 쓰이던 말로, 프린캡스와 로마 원로원을 뜻하는 '세나투스'(Senatus)를 합쳐 '프린캡스 세나투스'라고 하여, 유력한 원로원 의원에 대해 일종의 원로원 명예 의장같은 칭호로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프린캡스 칭호는 중세에 쓰인 프린스(Prince)의 어원이 되었다.
로마의 첫번째 황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기원전 44년 로마의 최고권력자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통해 정식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고, 후에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명실공히 로마의 일인자가 되면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었다. 이 칭호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임페라토르'(Imperator)는 그가 로마 군단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당시의 로마 군단은 이미 각 지휘관들에 의해 사병화되어있었으며, 이 군사력을 이용하여 로마 원로원과 로마 도시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였고, 이는 군단 지휘관의 정치적 입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임페라토르는 후에 황제를 뜻하는 '엠퍼러'(Emperor)의 어원이 된다. '카이사르'(Caesar)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이름에 붙이 가문의 이름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계승하는데 혈연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후대 권력자들이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계속사용하였으며, 후대 로마 제국에서 '부재'(공동 통치자, 후계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독일어나 러시아어에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Kaiser)와 차르(Czar)의 어원이 되었다. '디비 필리우스'(Divi filius)는 '신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카이사르가 사후에 신격화 되었기 때문에,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의 칭호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집권하면서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의 지위를 가지고 종교적 권위를 행사했기는 하나, 이 칭호 자체와는 큰 연관성은 없다. 그러나 이후 사망한 황제들을 원로원을 통해 신격화하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기원전 27년 내란을 종결시키고 사실상 로마의 최고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특권들을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게 반납하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원로원에 의해 '존엄한 자'라는 뜻의 칭호로 부여밭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칭호에 불과했지만, 그 뜻이 바로 그 신분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와 함께 황제를 뜻하는 칭호로 사용되었고, 카이사르가 부재를 의미하게 된 이후에도 황제를 뜻하는 칭호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칭호들은 모두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로마에서는 왕이나 참주 같은 단독 권력자, 즉 독재자에 대한 반감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종신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도 그러한 이유로 암살되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자신의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반감을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였다.
로마의 첫번째 시민 프린켑스 시비타티스
옥타비아누스가 특권의 포기를 선언하였지만, 그렇다고 진짜 모든 특권을 내려 놓은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먼저 원로원을 통해서 '프린켑스 시비타티스'(Princeps Civitatis)라는 '로마의 첫번째 시민'이라는 뜻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한명의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를 위해 헌신한 덕망있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칭호로, '한니발 바르카'의 위기에서 로마를 구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내부의 적들을 평정하고 로마를 안정시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도 수여된 전례가 있었다. 그리고나서 옥타비우스는 원로원의 요청을 통해 여러 속주들의 통치권을 받아 인사권과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모든 로마 군단의 지휘권은 사실상 옥타비우스에게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또 다른 내전, 혹은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는 원로원에게 선택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원로원이 관리할 수 있는 속주들도 있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양보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식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직접적으로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로마법에 어긋나는 특권들을 포기하였지만, 로마법에서 합법의 테두리에 있는 집정관과 속주 총독으로서의 군단 지휘권이나, 호민관으로서의 입법권과 거부권, 신체 불가침권 등의 권한들을 이용하여, 사실상 전제군주에 준하는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이런 직위들은 임기가 정해져있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교묘하게 계속 임기를 연장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임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옥타비아누스가 일개 로마시민이자, 동시에 최고의 로마시민으로서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이를 '원수정'(Principatu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 제국의 황제
옥타비우스가 로마의 첫번째 황제로 불리우고 있지만, 실제 군주제로서의 로마의 황제는 284년에 황제로 즉위한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부터 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전의 로마 황제들은 일부 혈연을 통해 세습하기도 하고, 일부 후계자 구도를 통해 세습하기도 하였으나, 그 지위가 다른 군주제 국가의 지배자들처럼 공고하지 않았고, 일부 황제들이 로마 구성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정통성을 추구하기도 하였으나, 그 정통성이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로마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거나 하는 경향이 나타나진 않는다. 그만큼 기존의 황제자리는 절대적인 지위라기 보다는 반쯤은 공직에 가까웠고, 황제가 특정 인물들이나 군부에 의해 암살 당하여 바뀌게 되어도, 반발은 있을지 언정 시민들이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뒤엎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에서 말하는 절대 군주의 의미인 황제와 서양의 황제의 기원이 되는 로마의 황제는 조금 다른 성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