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제2차 삼두정치의 한축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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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출세길이 막힌 귀족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로마의 유서깊은 '아이밀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로, 그와 같은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평민파와 원로원파의 사이의 갈등에서 원로원파에 가담하였으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휘하에서 참전하기도 하였고, 술라가 독재관이던 기원전 78년에는 집정관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평민파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당시 대표적인 평민파 호민관 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딸과 결혼하기도 하였다. 결국 기원전 77년에 일어난 에트루리아 시민들의 반란에 동조하였다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진압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레피두스의 아버지는 사르데냐 섬으로 추방당하였고, 남은 가족들은 처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사실상 출세길이 막히게 되었다. 레피두스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이 적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62년부터 기원전 58년 사이에는 조폐 관련 공직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출세를 위하여 형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와 함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군사적 경험을 쌓았고, 카이사르는 자신을 지지하는 레피두스 형제를 경제적으로 원조하여,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원조하에 형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기원전 55년에 조영관으로 아이밀리우스 가문의 조상들이 세운 '아이밀리아 바실리카'를 제건하였고, 기원전 50년에는 집정관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레피두스는 적극적으로 카이사르에게 가담하여, 카이사르와 원로원파의 내전에서 카이사르의 휘하에 합류하여 전투를 치르며,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후인 기원전 46년에는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 자리에 취임하였다.

제2차 삼두정치

기원전 44년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 지역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위해 준비중이었을때 카이사르 암살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기병대장(부독재관)이었던 레피두스는 혼란스러운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복수를 진행하려고 하였으나,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암살자들과의 사이에서 중재하면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후임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사제)로 임명되었고, 본래의 임지인 히스파니아로 떠나면서 중앙에서 잠시 멀어지게 된다. 이때 카이사르의 암살범들은 '갈리아 키살피나', 마케도니아,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하였고,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정식 후계자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 남아있던 원로원파들은 카이사르파인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여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로 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안토니우스는 임기가 끝나기 전에 근거지를 마련할 목적으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를 공격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43년 원로원파는 그 해의 두명의 집정관과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단을 주어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해 갈리아 깊숙이 도망쳤으나, 두명의 집정관은 전투중 전사함으로 인해 옥타비아누스가 군단 지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로원파의 주도로 카이사르파의 내분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너무 노골적이었던 원로원파의 태도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게 되었다. 원로원파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암살범이자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이었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에게 군단의 지휘권을 넘길 것을 종용하였으며, 동시에 폼페이우스의 아들이자, 내전 후 시칠리아로 도망쳐서 해적질을 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에게도 군단을 주며, 자신들의 목적을 공공연히 드러내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와 본래 카이사르 휘하에 있던 군단 병사들은는 원로원파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로마를 일시적으로 점거하였다. 그 사이에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와 합류하였고, 세사람은 레피두스의 중재하에 '보노니아'(현재의 볼로냐)에서 만나 회담을 가져, 카이사르의 복수를 이행하고, 로마의 권력을 삼등분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서 로마에서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이 당시 레피두스는 합법적으로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의 총독이었으며, 가장 많은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도 가장 컸다. 그에 비해 옥타비아누스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관리하기로 하였는데, 시칠리아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사실상 장악한 상태였다. 하물며 안토니우스는 이제부터 원로원파와 싸워 얻어야할 동방을 관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원로원파와 싸우기 위해 그리스로 출정한 것과 다르게 레피두스는 집정관으로서 로마를 관리하기 위해 남았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레피두스에게 악재로 돌아오게 되었다. 두번에 걸친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하여 내전을 종식시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전리품과 보상을 미끼로 레피두스 휘하의 군단을 포섭하여 가로채 버렸다. 그리고 과거 레피두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평화협정을 한 것을 빌미로, 그를 내통자로 몰아서 남은 군단과 통치지역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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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과 사망

이렇게 경쟁자들에 의해 눈뜨고 코베인 것처럼 몰락이 시작된 레피두스였지만, 그렇다고 제2차 삼두정치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41년에는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실각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때 옥타비아누스의 부탁을 받고 로마를 방어하였으며, 반란이 진압된 후에 그 대가로 반란에 가담했던 안토니우스의 군단과 북아프리카를 넘겨받았다. 레피두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재기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안토니우스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레피두스라는 무게추의 무게를 늘린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의 군단을 이용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장악하고 있던 자신의 영역인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기원전 37년에 '타렌툼'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협의 아래 제2차 삼두정치의 기간을 5년 늘렸으나, 레피두스는 이 회담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6년에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점령하고 있던 시칠리아로 쳐들어갔다.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는 사이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거점인 '메사나'에서 항복을 받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8개 군단을 접수하는 등 공적을 세웠는데, 이를 바탕으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코르시카에서 자신의 지휘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레피두스가 지휘하고 있던 군단의 병사들은 원래 안토니우스의 군단 소속이었고, 새로 항복한 군단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쉽게 회유할 수 있었고, 결국 레피두스는 모든 권력을 잃고 '키르케이'로 추방 당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강제 은거의 형식으로, 원로원 의원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할 수 있게 허가되는 등, 로마 정치계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형벌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한때 로마의 1인자의 측근에서, 로마 정치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리까지 올라가기도 했던 레피두스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하게 된 것이다. 대신 그는 더이상 정치적 혼란에 휘둘리지 않고 기원전 13년에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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