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의 새로운 정치체계 「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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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

고대 로마 공화정은 현대의 의회 민주주의의 시조라고 생각되고 있어, 상원을 영어로 'Senate'라고 하는데, 이는 원로원을 뜻하는 라틴어 'Senatus'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원로원은 로마의 시작과 함께 탄생하여, 사실상 운명을 함께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정도 인데, 그 성격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였다. 본래 원로원은 로마 왕국에서는 정책 결정권이 없는, 왕의 자문 기관적인 성격을 가진 귀족 회의체였다. 물론 로마 왕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왕국과는 다르게, 혈연을 중심으로 왕권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 로마에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가 왕으로 추대 되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그 중심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원로원의 권한은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하면서 극대화 되었는데, 사실상 최고 정책 결정기관이 되었고 볼 수 있다. 로마 공화정은 왕에 대해 히스테릭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단독의 최고 권력자가 없는 상태에서 실질적인 귀족정의 형태였던 원로원이, 소위 원로원 회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효율적인 정책집행과 군사적 행위를 이행하기 위해, '집정관'이라는 직책을 두기는 했지만, 이조차 두명으로 나누어 서로 견제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임기를 1년으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한 인간이라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그 현명한 인간들이 모여서 논의를 한다고 해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는 것 이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로마의 위기와 발전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낡은 제도를 개편하면서 로마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1차 삼두정치

그러나 이런 로마에서도 견제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입법권을 행사하기도 하고, 배심원으로 사법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며, 정책을 입안하거나 결정하고, 때에따라 초법적인 권한을 발휘하여, 특정 인물을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전권을 주거나, 특정 인물을 '로마의 적'으로 법적 적차를 건너뛰고 처벌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들은 원로원 회의에서 원로원 의원들의 표결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스스로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당시의 민주주의는 지금 생각하는 만큼 제도가 엄격하게 확립되어있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제도가 아주 잘 되어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당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선거를 위해 금품을 살포하거나, 폭력집단을 이용하여 시위하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실현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혹은 실현 자체로 국익에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선심성 정책을 입안하는 등,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실제로 현대의 필리핀이나 멕시코 등에서 일어나는 상대 후보를 살해하거나 하는 등의 일도 일어났다. 또 당시는 신분이 구별된 사회였기 때문에, 귀족들이 과거부터 자신의 가문에 속해 생활해 왔던 평민들을 후원하면서 핵심지지세력으로 삼아 정치적 영향력을 공고히 했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여러 귀족들과 정치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평민들이 이합집산을 이루어 연대하며, 선거를 치루거나 정책을 입안하였다. 고대에는 현대와는 윤리관 등도 많이 달랐기 때문에,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은 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였으며,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로인한 갈등은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부각되어 나타났다. 결국 쌓이고 쌓인 갈등은 평민파와 원로원파의 내전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였고, 그 과정에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서, 말그대로 무력을 통해 집권하는 최악의 정치형태까지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의 정치형태가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제1차 삼두정권'으로 불리는 것이다. 여러 전쟁에서 공을 세워

대단한 명성과 사실상 사병화된 군단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주류 원로원 의원들의 견제 때문에 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 그로 인한 인맥도 충분함에도, 여러 악평과 특출난 업적이 없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여러 공직활동을 통해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나, 정치적 입지가 없고 많은 빚으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가 절실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모여 만든 일종의 정치적 연합체인 것이다. 이들은 주류 원로원 의원들의 견제에 맞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이용해, 서로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좋게 말하면 이렇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전 군단병이나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폭력사태를 일으키거나, 금품살포와 인맥을 통해 회유와 압박을 가하여,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주요 공직에 앉히고, 자신들이 필요한 정책을 입안할 수 있게한, 소위 말하는 비밀 야합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적어도 술라가 한 것처럼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던 것을 보면 최악의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방법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러한 제1차 삼두정치는 대략 기원전 59년부터 크라수스가 전사한 55년까지는 완전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으며,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와의 두번째 혼인 동맹을 거절하고, 원로원파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의 딸과 결혼한 기원전 52년에는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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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삼두정치

'제2차 삼두정치'는 이름은 1차와 같은 삼두정치이지만, 그 성격은 많이 다르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 남겨진 카이사르파에 속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공식적으로 5년의 기한을 정하여 함께 로마를 통치하기로 협의하였다. 이 시기에 카이사르파인 세사람은 이미 사병하된 군단을 소유하고, 로마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차때처럼 비밀리에 진행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 내용도 단순한 정치적 원조가 아니라 로마의 통치 자체를 삼분하여, 자신들끼리의 충돌을 줄이고 외부의 적에 해당하는 원로원파의 처리를 최우선 목적으로 한 것이다. '필리피 전투'의 승리로 원로원파의 숙청이 사실상 완료된 후에는 로마와 원로원의 관리는 사실상 군단 병사들의 무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군사통치에 가까웠다고도 볼 수 있다. 세사람 중 레피두스는 나머지 두사람에 의해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배제되었지만, 어찌되었든 로마의 영향권을 세사람이 각자 나누어 통치하면서, 각자가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충분한 입지를 가질 수 있을때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43년에 시작된 이 정치협정은 기원전 38년 '타렌툼'에서 있었던 회담으로 한차례 연장되었고, 기원전 33년에 안토니우스가 연장을 거부하면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로마 제국

제1차 삼두정치는 말하자면, 특정세력에 의해 계속된 정치적 억압으로 인해 필요해진 새로운 탈출구에 대한 모색에서 시작된 온건한 방식의 정치적 타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나 결과가 어찌되었든을 떠나, 당시 이루어진 정책들은 대체로 로마의 구성원들이 바라는 것과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삼두의 한사람이었던 카이사르는 많은 로마 시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제2차 삼두정치는 사실상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의 내전에 있어서의 협력에 가까우며, 그 이후에도 사실상 자신들끼리의 내전을 미루는 정도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결국 기존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정이나 다름없던 원로원이, 그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세력을 정치적, 혹은 물리적으로 배척하고 억압하면서 쌓인, 말하자면 개혁의 물결이 분출된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2차 삼두의 한명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원로원은 사실상 황제의 자문역, 혹은 거수기로 전락하여 표면적인 정치기관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로마 제국에서도 원로원의 역할이나 형태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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