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왼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
- 역사
- 2023. 4. 8.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왼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는 기원전 68년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에트루리아 출신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군사적인면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활약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오른팔로 취급된다면, 마이케나스는 외교와 문화적인 부분에서 활약하여 황제의 왼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케나스가 언제 아우구스투스와 만나게 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로 생각되어진다. 마이케나스는 일반적인 로마인들이 단계를 밟아 공직 경험을 쌓는, 이른바 '쿠르수스 호노룸'을 거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법무관이나 집정관 같은 공직을 추구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실하여, 그의 개인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보조자로서 아우구스투스를 보좌하는데 주력하였다 . 이는 아그리파도 비슷하지만,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호민관이나 집정관을 역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로마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으로 이행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허울좋은 공직의 명예가 아니라 실권자와 함께하여 실리를 얻었다는 점에서, 마이케나스는 상당히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를 보좌하는데 전념한 마이케나스의 활동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별로 없어, 현대에서는 그 상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마이케나스는 '제2차 삼두정치'가 연장되게 된 '탈렌툼'의 회담에서 역할을 했으며,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싸우는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으로서 로마의 관리를 도맡아했다고 한다. 이 시기 아우구스투스가 혼란한 로마를 평정하고 명실공히 로마의 최고권력자로 설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이면에서 협력을 아끼지 않은 마이케나스의 공이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하면서 내란은 종식되었고, 마이케나스는 기원전 30년부터 사망하는 기원전 8년까지,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고문으로 사실상 비서같은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문예 후원자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보좌하면서,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이용해 젊은 시인들을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대표적으로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와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를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로마의 시성으로도 불리우는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자신의 저서인 '신곡'에서 저승의 안내자로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다. 평민 출신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마이케나스에게 후원을 받아, 그가 지은 '농경시'를 아우구스투스 황제 앞에서 직접 낭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로마의 건국을 다룬 서사시인 '아이네아스'를 쓰기도 하였다. 호라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의 소개로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았는데, 마이케나스에게 농장을 후원받은 호라티우스는 이후 경제적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마이케나스의 문예 후원 활동은 로마의 문화 예술이 발전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이후 이들의 문학작품에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활동이나 지원하는 사람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메세나(Mecenat)는 바로 마이케나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