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운명을 바꾼 기원전 최대의 해전 「악티움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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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제2차 삼두정치의 붕괴

기원전 38년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연합체인 '제2차 삼두정치'가 '타렌툼'에서의 협정으로 인해 5년 연장되었지만, 실상은 레피두스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의 상당부분을 상실하여 회담에 참가조차 못 하였으며, 사실상 본격적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정치적 영향력 싸움을 연장시키는 정도의 역할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레피두스가 완전히 실각하게 되었고, 안토니우스는 동맹을 공고히하기 위해서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하고 있었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와 혼인하면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가 이 정치적 협력관계의 기한 연장을 거부하면서, 공식적으로 제2차 삼두정치는 붕괴되었고, 로마를 동과 서로 양분하고 있던 두 거물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원전 31년까지 약 2년간 두사람은 앞으로는 서로를 비난하면서 여론전을 펼치면서, 뒤로는 착실하게 전쟁준비를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가 아닌 찬탈자이며,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것도 위조라고 비난하였고,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며,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 자리를 흔들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무시하고 불법으로 속주를 차지하여 외국과 전쟁을 벌였으며, 사사로이 로마의 영토를 이집트와 자기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을 통해 이집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고,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 그리스 지역에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이탈리아에서 '이오니아해'를 건너 그리스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고,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점령하면서 압박하였다.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함대를 이집트로 철수시킬 것을 제안하였는데, 안토니우스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당시 안토니우스의 진영에는 전염병이 돌아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으며, 옥타비아누스의 군단과 마주보고 있는 상태에서 함대를 온존하기 위해 충분히 필요한 조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이 소식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함대를 이용하여 이를 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악티움 해전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암브라키아 만에서 나와 이집트로 향하려고 했는데, 이를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가로막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총 500여척으로, 그 중 230척 정도가 전투 갤리선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약 250척의 군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토니우스 함대의 군선이 충각이 달린 대형선박이었던 것에 비해,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중소형 선박이 많아 불리하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전염병으로 인해 인원이 많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배의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점을 살리지 못하였다. 또 전투 시작직전에 안토니우스측 지휘관이었던 '퀸투스 델리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여, 안토니우스의 전략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사실 안토니우스 군단의 병사들도 로마 군단이었기 때문에, 정세상 이집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으로 보이는 전투에 가담하게 된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많은 군단과 도시들이 양자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협력할 상대를 가늠하고 있었지만, 이는 사기에 큰 영향을 안토니우스 군단의 병사들이 잇따라 탈영을 계속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안토니우스에게 불리한 영향이 많은 전투였지만, 전투자체는 백중지세로 계속되었다. 함대전은 호각의 상태로 지루하게 계속되었고, 혹자들은 전투가 이대로 계속 진행되었다면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승리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황은 지휘관의 한순간의 선택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 함대의 뒷편에 있던 클레오파트라가 지휘하던 함대가 갑작스럽게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그대로 이집트를 향해 퇴각해 버렸다. 이러한 행위는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던 내용인 것 같은데,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안토니우스도 서둘러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퇴각해버렸다고 한다. 지휘관을 잃은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차례차례 옥타비아누스 함대에 의해 나포되거나 침몰되었고, 전투는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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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의 몰락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전투중에 퇴각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기회가 오자 본래의 목적이었던 이집트로의 철수를 이행하였던 것 일 수도 있고, 단순히 클레오파트라가 전투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토니우스 또한 그저 클레오파트라를 따라가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전투의 패배를 예상하였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한번의 전투에 불과했던 이 해전의 결과는 그대로 내전의 결과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저울질 하면서, 이 대규모 해전의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많은 군단과 도시들이 앞다투어 승자에게 찾아들었다. 그리스에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군단도 모조리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해 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옥타비아누스는 겨울 동안 안토니우스를 쫒지 못하고, 자신의 진지에 찾아오는 항복 사절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게 지냈다고 한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또한 사실상의 전면 항복 제안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하였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후 로마를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넣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서 로마 제국의 막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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