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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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기원전 69년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 기원전 323년부터 이집트의 총독이 되었으며, 기원전 305년에는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군림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계로 생각되어진다. 또한 이집트의 지배자인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서서 통치하였기 때문에,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지독한 근친상간을 계속해왔는데, 아울레테스도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혹은 6세)와 결혼하여 왕가를 유지하였다. 또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남자는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쓰고, 여자는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썼기 때문에, 상당히 구분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기원전 51년에 아울레테스가 사망하면서,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단독 여왕으로서 통치하려는 면모를 보이자, 프톨레마이오스와 섭정 '포티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하야시키고 이집트에서 추방하였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 쫒겨난 기원전 48년에는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중심으로한 원로원파 사이에서 한창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원로원파가 패배하면서 승기가 카이사르쪽으로 기울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재기를 노리고 이집트로 몸을 피했다. 폼페이우스가 과거 아울레테스를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처음에는 그에게 협력하기로 하였으나,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 상륙할 즈음에 마음을 바꾸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부하들은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고, 그 머리를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이집트에 온 카이사르는 그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르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접근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융단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 융단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카이사르와 만났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사이를 중재하여 다시 이집트를 공동 통치 하도록 권하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카이사르의 이러한 결정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소수의 병력만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이를 기회로 여기고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하여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숫적 열세였던 카이사르 군단은 왕궁과 시가지 일부, 항구 등을 요세화 하면서 버텼고, 이후 로마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기원전 47년에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면서, 클레오파트라가 실권을 잡고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망치던 중 나일강에 빠져 익사하였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표면적으로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하고 공동 통치자로 내세웠으나,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1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실상 클레오파트라가 모든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 시기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5세 필로파토르 필로메토르 카이사르'를 낳았는데,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5세는 '카이사리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는데, 이는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이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많은 애인을 두었던 것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더해, 이러한 이유로 흔히 두 사람이 애인 관계였다고 회자된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6년 로마에서 이루어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도 참가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몇번 로마를 방문하였고,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죽을때까지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유서에서도 카이사리온은 거론하지 않았다. 이즈음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세우고, 자신의 공동 통치자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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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43년부터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클레오파트라는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제2차 삼두정치'를 중심으로한 카이사르파를 지지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파가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하고, 안토니우스가 동방 지역을 관리하게 되었을때, 기원전 41년 '킬리키아'의 '타르소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만나게 되었다. 두사람이 그 이전에 만난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이 만남에서부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미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았으며, 일설에 의하면 그 아이들도 옥타비아가 길렀다고 한다.

로마 내전과 몰락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을 방문하였고, 이때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안 그래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를 더욱 나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기원전 35년에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기념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하였는데, 이는 로마 시민들에게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무시한다는 인식이 생기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녀와 자신 사이에 자식들을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의 왕', '시리아와 리비아의 왕' 등 거창한 칭호를 붙이고, 카이사리온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로 적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공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비판하였고, 두사람은 로마에서 서로를 비난하면서 전쟁준비를 시작하였다.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을 통하여 정식으로 이집트와 전쟁을 선포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이에 대응하여 군단을 모아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면서, 승기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울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후퇴하였으나, 이 전투를 지켜본 군단들과 도시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가담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저항하며 몇번의 전투를 치루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전투 중 후퇴하다가 클레오파트라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관하여 자해하였다. 아직 숨이 붙어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곳 까지 옮겨져서, 그녀의 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까지 옥타비아누스에게 자비를 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음독하여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사실상 이집트의 파라오는 그 명맥이 끊기게 된다. 로마 제국이 성립된 이후 로마 황제가 명목상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기도 하였으나, 그 상징성이 남았을 뿐 실질적인 이집트의 통치자 파라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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