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옥타비아누스의 경쟁자「마르쿠스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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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카이사르의 먼 친척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83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그의 할아버지가 기원전 99년에 집정관을 지내면서, 어느정도 로마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뛰어난 웅변가로 명성이 있었던 할아버지는 기원전 8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했을때,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인 '율리아 안토니아'인데, 안토니우스가 아직 아이 였을 때 남편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이었는지, 안토니우스는 젊었을때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기원전 63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함께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는 안토니우스의 삼촌인데, 그 해에 일어난 '카틸리나의 음모' 사건에 휘말려 안토니우스의 양부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가 죽자, 막대한 빚을 지고있던 안토니우스는 유학을 핑계로 채권자들을 피해 그리스로 떠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아테네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지만, 기원전 57년경에는 로마 군단에 입대해 시리아의 속주의 총독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휘하에서 '유대'와 이집트 지역에서 복무하며, 이때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방문하였다고 한다.. 안토니우스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 같은데, 이때 참전한 여러 전투에서 용맹한 모습을 보여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기원전 59년 집정관을 지낸 카이사르는 임기가 끝나자 '갈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갈리아 원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54년에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지역으로 전출을 희망하여, 카이사르의 군단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원정에 합류하였을때는 이미 원정의 막바지였으나, 카이사르 밑에서 사실상 고속승진하여 카이사르의 오른팔 취급을 받게 된다. 이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을 카이사르가 높이 산 점도 있겠지만, 카이사르의 친척으로서 카이사르 본인이나 주변에서 안토니우스의 역할을 상당히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52년에는 재무관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49년에는 호민관에 선출되어 카이사르의 지지자로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원로원파의 정치적 공격에서 카이사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내전과 암살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이 시작될 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합류하여 같이 행동하였으며, 내전기간 동안 카이사르 휘하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군단에 맞서 싸웠다. 그리스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승기가 카이사르쪽으로 기울자, 기원전 47년 안토니우스는 기병대장(부독재관)으로 임명되어 카이사르가 부재중인 이탈리아 지역의 통치를 맡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중용하면서도 그의 방탕한 행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이때 예산을 너무 낭비하거나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과잉 진압하는 등 실정하여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한동안 카이사르와도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2년 후인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 자리에 취임하였다. 그 해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로마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안토니우스는 집정관으로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당시 기병대장(부독재관)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군대를 이끌고 카이사르의 복수를 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암살자들과의 사이에서 중재해 로마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했다. 이로서 일시적이긴 했으나 안토니우스는 원로원파의 협조를 얻으며 로마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을 수 있었고, 암살의 주요 가담자들은 속주의 총독 자리에 부임하는 형태로 로마에서 몸을 피하였다. 그리고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공표되었다. 그러나 원로원파는 안토니우스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키케로를 중심으로한 원로원파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며 안토니우스를 견제하였고, 이에 집정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안토니우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갈리아 키살피나' 의 총독 자리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사실 안토니우스의 중재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이 모두 생존해 있었으며, 심지어 각 지역 속주의 총독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파는 안토니우스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키케로는 자신을 따르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여, 카이사르파끼리 내분을 유도하여 자멸시키고, 그 빈자리를 다시 자신들이 차지할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 자리도 암살자 중 한명이었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안토니우스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떠나 갈리아 키살피나 지역으로 쳐들어갔다. 기원전 43년 원로원파는 이를 구실로 하여 두명의 집정관과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단을 주어 안토니우스를 진압하게 하였다. '무티나 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깊숙히 도주하여 레피두스와 합류하였지만, 두명의 집정관은 전투중 전사하였고 옥타비아누스가 군단을 차지하게 되었다. 원로원파는 기세를 몰아 남은 카이사르파를 일소하고자, 군단의 지휘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넘기도록 하고,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에게도 군단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노골적인 원로원파의 요구에 옥타비아누스와, 원래 카이사르 밑에서 복무했던 군단의 병사들이 거부하였고, 이에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의 주범 중 하나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총독으로 있던 마케도니아 속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갈리아 부족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자신을 공석이 된 집정관에 임명하여 정식으로 군단 지휘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었고, 이에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내려가 무력으로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이때 원로원파는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올 것을 요청하였으나,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이 요청을 거부하고,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한 카이사르 암살의 주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협력하여 군대를 모아 카이사르파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이에 로마에 있던 원로원파는 다시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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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삼두정치

로마를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현재의 볼로냐)로 북상하여,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만났고, 세사람은 카이사르의 복수와 로마의 통치를 위해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게 되었다. 카이사르파는 로마에서 키케로를 비롯하여, 카이사르의 암살에 가담한 자들과 원로원파 인물들을 숙청하였고, 그리스로 건너가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군단을 두번에 걸친 '필리피 전투'에서 물리치고, 로마의 영향권을 삼분할하여 다스리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와 동방을 맡기로 하였고,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맡았으며,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갔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속주들을 관리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를 불러 반란 혐의로 조사하는 등 만남을 가졌으며, 겨울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실각시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한때 로마를 점거하기도 하였으나, 안토니우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페루시아'에서 패배하였다. 이 반란에 안토니우스가 호응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의 면목으로 사면되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되어 사실상 로마에서 배제되었고, 풀비아는 동방으로 도주하였으나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로마와 갈리아 지역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찾아와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혼인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에 함께 대항하기로 하고, 시칠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휴전하였으며, 기원전 38년에 '타렌툼'에서 회담하여 삼두정치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

이 무렵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사이는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7년 이집트의 도움을 받은 안토니우스는 '유대'지역을 회복하였고,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원정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지원을 약속한 '아르메니아'가 배신하면서 패배하였다. 한편 기원전 36년에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시칠리아로 향하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레피두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나 옥타비아누스와 달리 사실상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는데, 대립 과정에서 완전히 실각하게 된다. 이로서 로마의 정세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립구도로 정착하게 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내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있었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대하게 개선식을 행했는데, 로마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개선식을 행하는 것은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녀와 자신 사이에 자식들을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의 왕', '시리아와 리비아의 왕' 등 거창한 칭호를 붙이고, 카이사리온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로 적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공표하였다. 이는 옥타비아누스 뿐만 아니라 로마까지 뒤흔드는 말로,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통해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홀렸다는 평이 많이 있다.

로마의 적

기원전 33년 형식상으로는 기간 만료로 제2차 삼두정치가 막을내렸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서로를 비방하면서 주도권 싸움을 벌였는데, 기원전 32년에 원로원 의원의 약 1/3이 안토니우스 편을 들자,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비난했고, 그들은 실제로 로마를 떠나 동방으로 가서 안토니우스에게 합류하였다. 그 사이에 두 진영은 전쟁준비를 계속하였고,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을 통해 정식으로 이집트에 선전포고하면서 내란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그리스로 이동하여 전선을 구축하였으며, '악티움' 인근에 주둔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도 그리스에 상륙하여, 그리스 서부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안토니우스를 견제하였다. 양군이 대치하게 되자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하며 함대를 알렉산드리아로 철수시킬 것을 권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이를 알게된 옥타비아누스가 함대를 전개하여 저지하면서 '악티움 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안토니우스 진형에는 전염병이 돌아 함대가 만전이 상태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 개시 직전에 안토니우스 휘하에 있던 '퀸투스 델리우스'가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여 전략이 폭로되기도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백중지세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지휘하던 함선들이 돌출되어 전선을 이탈하여 이집트로 퇴각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창 전선에서 전투중이던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가 퇴각하는 것을 보고,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그대로 퇴각하였고, 약 40척의 함선이 안토니우스와 함께 전선을 이탈하였다고 한다. 지휘관이 사라지진 안토니우스 함대는 그대로 붕괴하였고,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러한 전투 내용 때문에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결정적 이유는 전장에서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클레오파트라와 이를 패배로 오인하고 따라 후퇴한 안토니우스의 오판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본래 목적이 함대의 알렉산드리아까지 퇴각이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호각인 상태로 지루하게 전투 이어지는 와중에 적 포위망을 뚫고 알렉산드리아까지 퇴각한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크게 간과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전투의 향방을 모든 로마의 구성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으로 명목상 로마와 반목하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 안토니우스의 군단은 모두 로마의 군단이었으며, 안토니우스가 사실상 통치하고 있던 동방은 클레오파트라가 지배하는 이집트와 동맹한 것이 아닌, 로마와의 동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지휘관이 탈영한 것처럼, 안토니우스의 군단은 사실상 안토니우스 개인과 이집트를 위해 싸우는 것으로 느껴지는 전쟁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사기도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입장에서는 성공적으로 알렉산드리아까지 퇴각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전장에서는 미리 계획된 포위망 돌파와 질서정연한 퇴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클레오파트라의 함대와 안토니우스의 함대 일부만 퇴각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는 사실상 패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비록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에 의해 로마의 적으로 선포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승자가 명분을 갖게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계속 따르고 있던 자들이 사기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리스에 남겨진 안토니우스의 군단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였고,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거의 모든 세력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앞다투어 투항하였다.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추격하지 않고 그리스에서 지내면서 항복하는 사절들을 받아들이면서 분주하게 지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토니우스의 몰락

이후 기원전 30년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군단이 이집트에 상륙하여 안토니우스와 전투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도중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비관하여 자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소식이었고, 안토니우스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곳까지 당도하여,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도 옥타비아누스에게 자비를 구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고,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의 권력의 정점에서서 로마의 공화제가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안토니우스의 피는 계속 계승되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혈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피가 계승되어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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