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변호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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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평민 출신 변호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이탈리아 반도 내의 '아르피눔'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아르피눔의 유력자의 아들로, 그 재력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어렸을때부터 로마에서 수사학이나 웅변술 등 여러 교육을 받았으며 자랐다. 기원전 91년부터 로마에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참전했던 것 같은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복무 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폼페이우스와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기원전 88년 이후부터 평민파와 원로원파가 내전을 겪는 동안은 그리스 지역의 아테네나 로도스 등지에서 유학하면서 학문에 힘썼고, 이때 아테네에서 평생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와 만난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80년경에는 26세에 로마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부친 살해 혐의로 고발된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하면서 로마 사회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키케로는 변론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권력자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79년부터 2년간 다시 그리스 지역과 '아나톨리아'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후 로마로 귀국한 키케로는 기원전 75년에는 재무관으로 선출되어 시칠리아 지역에서 임기를 보냈으며, 이 인연으로 기원전 70년에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탐관오리였던 전 시칠리아 총독인 '가이우스 베레스'를 고발해 줄 것을 의뢰받기도 하였다. 이 소송에서 승소하였는데, 이때 쓴 '베레스 반박문'이 유명하다. 또 안찰관으로 선출되어있었던 키케로는, 시칠리아인들이 보답으로 곡물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주었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성공적인 임기를 보내며 정치적 입지를 높여갔다. 기원전 66년에는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이 당시 로마 정치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폼페이우스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같은 이들은, 별다른 공직 경험없이 평민파와 원로원파의 내전에서 승리한 원로원파에 가담하여 세운 군사적 공적 등을 인정 받아 집정관을 지냈던 것에 반해, 키케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직경험을 쌓아 단계를 밟아가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형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키케로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집정관이 되기까지는 이러한 키케로와 같은 방식으로 공직경험을 쌓았다.

카틸리나 반박문

키케로는 기원전 63년에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때 같이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3위로 낙선하게 된다. 카틸리나는 전년도에 이어 이번이 집정관 선거에 두번째 도전이었는데, 그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부채 전액 탕감 등 로마의 하층민들을 타겟으로 삼은 급진적인 선심성 공약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에 패배한 카틸리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다음해 집정관 선거에 또 참가하였다. 키케로와 원로원에서는 카틸리나가 내세우는 정책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선거를 지연시키는 등 공작을 통해 방해했고, 결국 다시 낙선한 카틸리나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다른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였다. 부채탕감 등 카틸리나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나, 현 원로원 체계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키케로는 이 음모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었으며 가담자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원로원에서 계속 거론되었고, 결국 키케로와 원로원은 뚜렷한 증거없이 카틸리나에 대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였다. 카틸리나는 계속해서 증거를 요구하였고, 이에 키케로는 '카틸리나 반박문'을 써, 연설을 통해 카틸리나를 추궁하고 좌중을 설득하였다. 결국 대규모 카틸리나 토벌군단이 편성되었고, 카틸리나와 그 동조자들은 섬멸되었으며,키케로는 혼란으로부터 로마를 구했다 하여 국가의 아버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재판도 없이 그들을 처벌한 것에 대해 키케로를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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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 내전

기원전 60년 로마에서는 카이사르를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연합하여 '삼두정치'체제로 비밀 정치 연합체를 결성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카이사르가 키케로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로마 정치는 삼두정치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기 때문에, 그들과 정적에 가까웠던 키케로는 카틸리나 일당의 처벌에 관한 문제로 고발당하여,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키케로는 로마 정치권에서의 전성기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는데, 한때는 죽음을 선택하려고도 하였지만, 친구인 아티쿠스와 서신을 교류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폼페이우스가 정치적 필요에 의해 키케로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였지만, 이때부터 키케로는 정치 활동 보다는 저작 활동에 더 힘을 쓰게 되었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정치적 공격에 의해 카이사르가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이 발발하게 되자, 키케로도 어느 편의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키케로는 일단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에 가담하였지만, 이탈리아내에 머물면서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회유에 응하지 않고 계속 원로원파쪽에 남아있었고, 이후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고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스로 건너가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내전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면서 사실상 승자가 정해졌다. 후방에 있어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키케로는 이후 남은 원로원파에서 입지가 좁아지자, 로마로 귀환하였다. 카이사르는 '클레멘티아'(관용)를 발휘하여 항복하거나 생포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사면해 주었는데, 카이사르가 로마로 귀환하던 중 인파들 사이에서 키케로를 발견하자, 그를 불러 함께 나란히 걸으며 존중해 줬으며, 내란에 대한 책임은 일절 묻지 않았다. 키케로도 이러한 자신의 입지를 이용하여 패배한 원로원파 인사들과 카이사르의 사이를 중재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키케로는 내전에서 패배하고 자결한 사실상 원로원파의 우두머리였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카토)를 찬양하는 내용의 저작물인 '카토'를 출간하였고, 이에 카이사르는 그 내용을 반론하는 '안티카토'를 쓰기도 하는 등의 일도 있었고, 정치보다는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카이사르 암살과 최후

기원전 44년 종신 독재관이었던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 키케로는 암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암살자들의 요청에 의해 전면에 나서 그들을 대변해주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암살자들의 편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편이었다. 원로원파를 중심으로한 소위 공화주의자들은 카이사르가 독재자이며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였지만,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의 정체성보다 당장의 생활여건을 개선시켜 준 카이사르를 더 지지하였다. 이전에 키케로에 의해 실각하고 사망한 카틸리나의 선심성 정책에 많은 지지자들이 모인 것이 대변하듯, 원로원파를 중심으로한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에 관심이 있었으며 로마의 현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결국 실권과 명분은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된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갔고, 암살자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중재로, 각지의 총독 부임을 명목으로 도망치듯 로마를 떠났다. 키케로는 로마에 남아있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어받는 것을 견제하면서 공화정을 지속시킬 수 있도록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와 함께하였다. 키케로에게는 아직 10대에 불과한 어린 옥타비아누스가, 비록 카이사르의 정식 후계자였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키케로는 '필리피카이'를 발표하여, 자신의 특기인 연설을 통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공격했고 로마 정계를 휘어잡아, 기원전 43년에는 집정관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의 주도하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기 위한 군단까지 편성하였다.'무티나 내전'에서 토벌군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패배시켰고, 그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두명의 집정관은 모두 전사하였고, 군단의 지휘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키케로는 권력을 중심으로 카이사르파의 내분을 이용하여 그들을 일소하고, 암살자들을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공화정을 공고히하려고 했던 것 같으나, 정국의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결국 기원전 43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사이에 '제2차 삼두정치'가 막을 열게 되었다. 키케로는 사실상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의 공적이 되었고, 로마를 떠나 도피하던 도중에 살해당하였다. 사후 키케로의 머리와 손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져, 로마 광장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키케로는 후에 많은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로마 최후의 공화주의자로 대변되지만, 그 또한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로마의 문제보다는 정치 체계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치활동보다는 많은 저술활동이 더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라틴어 문학사에 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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