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역사
- 2023. 4. 6.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기원전 64년에서 기원전 6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평민 출신인데 소위 평민 귀족을 뜻 '노빌레스' 출신이 아닌, 일반적인 평범한 평민 출신으로 생각되어 진다. 이 때문에 젊은 시절이나 출신 가문에 대한 내용은 알기 힘들다. 아그리파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직접, 후에 자신의 후계자가 되는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를 주선해 주었는데, 여기에서 아그리파가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 복무를 했으며, 카이사르와 아그리파가 '클리엔텔라' 관계로 묶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가 허약한 체질에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젊지만 재능이 있는 아그리파를 눈여겨보고, 두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안배하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매우 적절한 인선으로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서 대승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카이사르는 아그리파에게 그리스 유학을 권하는 등 평민출신인 아그리파가 충분한 교육을 받아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운 것으로 보인다. 유학시절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군사학과 그리스어 등을 공부하였으며,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였는데,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곧 로마에서 긴급서한을 받게 된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는 갑작스럽게 당시 로마 최고의 권력자였던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원로원파나 카이사르파내의 불만 분자에 의한 위험이 있었음에도, 아그리파와 함께 비무장으로 로마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아그리파는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평생의 동반자로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아그리파는 실질적인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대리인으로, 옥타비아누스 대신 군단을 지휘하여 그를 도왔는데,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실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하였으며,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친구로서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했다고 한다. 기원전 42년에는 '필리피 전투'에 참전하여, 원로원파를 처단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파가 로마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협력하였으며, 기원전 41년에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와 동생이 일으킨 '페루시아 내전'에서도 활약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제2차 삼두정치'의 협약으로 이탈리아 본토와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당시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지역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로마로 곡물이 수송되는 것을 방해하는 등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아그리파는 이러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옥타비아누스 대신 해군을 양성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공격한 '시칠리아 내전'에서도 크게 활약하고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친구이자 정치적 우방인 아그리파를 위해, 그를 호민관에 당선 시키거나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등 정치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아그리파도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이탈리아에서 반옥타비아누스의 움직임이 일때마다 군사적으로 진압하거나 회유하는 등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그의 정치적 근거지를 안전하게 확보하였으며,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지지받을 수 있도록 일조하였다. 기원전 31년에는 안토니우스와의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명실공히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일인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이 승리를 기념해 로마에 '판테온'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판테온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새로 지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기원전 27년 로마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고 선포하고, 원로원의 만장일치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로서 옥타비아누스는 35세의 나이로 사실상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로마 제정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로마 군단을 감축하거나 원로원을 개편하는 등 개혁정책을 추진하였고, 군단을 재편성하고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해 '다뉴브 강' 방어선을 확립하는 등 군사분야 뿐만 아니라 행정 분야에서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또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하여,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혈연을 중요시 여긴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많은 자식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허약한 체질의 자신이 일찍 죽을 경우를 대비하여, 아그리파를 후계자로 선정하여, 자신의 후계자들 사이를 연결하며 보필해 주기를 원했던 것 같지만, 오히려 강건한 체질이었던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보다 훨씬 먼저인 기원전 12년에 51세의 나이로 급사하게 되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많은 정무로 인한 오랜기간 이어진 과로가 원인으로 생각되어진다. 많은 학자들이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아우구스투스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는 친구 아그리파가 승리를 가져다 줄때까지 침대위에 누워서 기다린다'고 조롱했다고 할 정도로, 아그리파의 군사적, 행정적, 그리고 인간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로마 제국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