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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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카이사르의 후계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기원전 63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옥타비우스가 태어났을때 아버지가 점성술사에게 아이를 들에 버리라는 점괘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그냥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옥타비우스의 집안은 본래 로마 근교의 소도시 '벨리트라이'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로마 시내의 인구가 늘어 혼잡해지자 어린 옥타비우스는 벨리트라이로 이사해 거기서 자랐다고 한다. 옥타비우스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옥타비우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에서 엄청난 인기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옥바티우스는 카이사르와 혈연인 점도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 밑에서 경력을 쌓아 출세하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싸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원로원파의 잔당을 정리하기 위해 '히스파니아' 원정을 진행하였는데, 이 원정에 옥타비아누스도 참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병이 나서 원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병세가 호전되자 소수의 인원과 함께 배를타고 카이사르의 막사 찾아와 원정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를 눈여겨보기 시작하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소개하여,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게 하였고, 두 사람을 그리스의 아폴로니아로 유학보내었다. 옥타비우스는 유학기간 동안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 등을 공부하였고, 아그리파와의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 당하면서 로마는 큰 혼란에 휩쌓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옥타비우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로마로 향하기로 하였다. 주위에서는 18세의 어린나이였던 옥타비우스가 혼란한 상태인 로마로 가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옥타비우스는 로마행을 강행하여 비무장인 상태로 로마에 입성하였고,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카이사르의 정식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이때 옥타비우스는 정식으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되었다.

제2차 삼두정치

기원전 44년에 로마의 집정관은 카이사르와 그의 측근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였다. 또 카이사르의 측근 중 한명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기병대장(부독재관)이자 히스파니아의 총독으로서 임지에 부임하기 위해 준비중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레피두스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들어와 암살자들을 단죄하려고 하였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다르게 행동하였는데, 그는 로마의 혼란을 진정시킨다는 이유로, 암살자들과 레피두스 사이를 주선해서 로마에서 일어날 유혈사태를 막았고, 이에 레피두스는 총독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시 히스파니아로 향하였다. 그리고 암살자들에게는 이전에 미리 카이사르와 정해둔대로 총독자리를 주어 사실상 로마에서 쫒아내었다. 이렇게 되자 당면 로마에서 실권은 안토니우스가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 암살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과 카이사르파의 인물들과 병사들이 계속 남아있었고, 반대편에서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과 암살에 찬동한 자들 또한 모두 살아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정한 지반위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그저 명목상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불과했다. 로마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찾아갔다.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와 카이사르의 친분을 이유로 들며 키케로와 가깝게 지냈지만, 동시에 키케로는 카이사르 암살 찬동파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내 키케로는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카이사르 이전 시대로의 회귀를 달성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정치적으로 공격하였으며, 이를 위해 옥타비아누스를 전면에 내세워,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파의 권력 다툼으로 포장하였다. 이러한 키케로의 행위를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당시 아무것도 없는 일개 로마 시민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밑에서 여러 경력을 쌓은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와 대적하기 위해, 일부로 키케로에게 접근하여, 그를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그 의도가 어떤 것이었던 간에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집정관 임기가 끝난후에 키케로를 위시한 원로원파의 공격으로 실각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결국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을 직접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43년 원로원파는 이를 기회로 삼아, 안토니우스가 로마법을 어겼다는 것을 빌미로, 그 해의 두명의 집정관과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단을 주어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고,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이자 카이사르의 암살범 중 한명으로 자신들의 편이었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를 구원하게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깊숙이 후퇴하였으나, 두명의 집정관은 전투중 전사하여, 군단의 지휘권은 일시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갖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에 고취되었는지, 키케로와 원로원파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단의 지휘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넘길 것을 명령하였고, 한편으로는 카이사르의 라이벌이자 원로원파의 구심점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에게 군단을 주어, 카이사르파를 숙청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본래 카이사르 군단의 병사들이었던 군단병들은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고, 본래 데키무스 브루투스 총독 밑에 있던 병사들 또한, 카이사르의 암살범과 같이하기를 거부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류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따르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점거하였고, 안토니우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통치하던 레피두스와 합류하여 로마로 진군하였다. 세 사람은 '보로니아'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는데, 여기서 자신들끼리의 분쟁을 끝내고 원로원파를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하였는데, 이로 인해 키케로를 비롯하여 원로원파의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탈리아 밖의 로마 속주의 총독이자, 카이사르 암살의 주범이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자신들이 다음 차례임을 알고, 병사를 모아 자신들의 임지 근처인 그리스 지역에서 농성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2년 두번에 걸친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삼두의 당면한 과제가 해결되었다. 이때 레피두스가 사실상 실각하게 되었는데, 본래 회담에서는 안토니우스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포함한 동방을 관리하기로 하였고, 레피두스가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를, 그리고 옥타비우스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를 관리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가 관리하는 동방은 상당부분 원로원파가 총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지역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대신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가 쌓이는 지역인 만큼 많은 재산과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레피두스는 원래 히스파니아 지역의 총독이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북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할 만한 수준이기도 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비록 이탈리아와 로마를 수중에 두긴 하였지만,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섬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와 대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불리한 분배구조 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 삼두중에 가장 취약한 입지였던 옥타비아누스가 감당했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내전이 끝나자 안토니우스는 경쟁자인 레피두스를 먼저 견제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은데, 그들은 레피두스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것 등의 이유를 들어, 그의 본거지 였던 히스파니아를 옥타비아누스가 관리하게 하고,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 지역만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히스파니아는 사실상 레피두스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이 결정으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선심쓰듯 관리하기 어려운 땅을 넘겨주고, 동시에 강력한 경쟁자인 레피두스는 관리하는 영토를 줄인 것이다. 이때부터 제2차 삼두정치는 명목상 삼두가 행하는 정치이긴 하지만, 그 중에 1두가 배제된 균형이 맞지 않은 형태로 계속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결정으로 자신이 두 경쟁자를 제치고 확실한 우위에 섰다고 자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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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가 동방을 안정시키는 사이, 이탈리아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에 참전했던 군단 병사들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일을 해결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앞바다에 있는 섬들을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집요한 괴롭힘도 해결해야 했다. 또 안토니우스 본인은 동방에 있었지만, 로마에 있는 그의 아내 '풀비아' 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중심으로하는 안토니우스 세력의 견제에도 신경 써야 했다. 먼저 옥타비아누스는 제대하는 병사들을 위해, 이탈리아 내에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원래 그 토지에 살던 시민들을 강제로 쫒아내었다.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이것을 옥타비아누스를 실각시킬 기회로 여겨, 안토니우스와 협의없이 독단적으로 이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레피두스를 끌어들여 로마의 방위를 맡기고 반란군을 상대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한때 로마를 빼앗기기도 하였지만, 기원전 40년 '페루시아' 공성전에서 승리하면서 내란을 종결지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주모자인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봐서 처벌하지 않았지만, 대신 다른 반란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반란에 가담하였던 안토니우스 휘하의 군단은 레피두스에게 주어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해방된 풀비아는 안토니우스가 있던 그리스 지역으로 떠났으나 사망하였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하였다. 한편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곡물이 수송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기근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을 맺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코르시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배 영역으로 인정해주는 대신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본격적으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시간을 벌기위함 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이러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안토니우스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에 기원전 37년 '타렌툼'에서 회담을 열어 제2차 삼두정치의 기한을 5년 연장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사실상 실각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레피두스는 이 협상에 참여하지도 못 하였다. 이 회담의 결과로 안토니우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공략을 위해 전함 120척을 지원해 주기로 하였고, 대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2만명의 병사들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기원전 36년 준비가 끝난 옥타비아누스는 북아프리카에 있던 레피두스까지 끌여들여 시칠리아를 공격하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지휘하는 군단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군단에게 연전연패하였지만, 아그리파가 합류하여 전쟁의 승패를 뒤집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동방으로 도주하였으나, 후에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잡혀 처형당하였다.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거점인 '메사나'에서 항복을 받고, 남겨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군단을 접수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시칠리아를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레피두스 휘하의 군단은 기존에 이탈리아에서 내란을 일으켰던 안토니우스의 군단과 이번에 시칠리아에서 접수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결속력이 약하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매수와 회유에 군단이 와해되었고, 레피두스는 재기의 기회를 놓치고 완전히 실각하였으며, 이로 인해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정국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구도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 사이 안토니우스도 계속해서 동방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와 유대 지역의 유력자들을 포섭하였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중심으로 로마 동방지역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옥타비아와 이혼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자신은 시칠리아 공략을 위해 전함 120척을 지원하여 약속을 지켰지만, 옥타비아누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기존의 협약과 달리 2,000명의 병사만 지원했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가 제2차 삼두정치의 기간 연장을 거부하면서 본격적으로 두 사람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약 2년 동안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앞에서는 서로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여론전을 펼쳤고, 뒤에서는 차근차근 전쟁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을 통해 정식으로 이집트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직접 공략하기 위해 그리스에 전선을 세우고 이탈리아로 상륙하려고 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의 함대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그 사이 옥타비아누스의 군단이 그리스에 상륙하여, 안토니우스의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 근처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함락시키면서 견제하였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리스 지역이 자신들에게 불리함을 이야기하고 함대를 이집트로 철수시키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안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방해하면서 '악티움 해전'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대패하면서, 안토니우스 휘하의 군단과 도시들이 대거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였고, 이집트로 퇴각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하면서, 옥타비아누스는 명실공히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프린키파투스

로마는 왕정으로 시작하였지만, 공화정으로 이행하고나서부터는 병적으로 왕을 거부하였다. 당시의 고대사회에서는 로마 주변에는 왕국이 많이 있었으며, 그리스의 일부 민주주의 제도가 있는 도시국가에서도 참주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통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는데, 로마를 개혁하려고 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그를 살해하면서 그가 왕이 되려고 하였다며 날조하기도 하였고, 카이사르가 암살된 것도 그가 종신독재관으로 왕처럼 군림하지 않을까하고 공화주의자들 의심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실제로 독재정치를 시행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절대 그러한 모습을 보여서는 않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통해 '프린켑스 시비타티스'의 칭호를 받았다. 이는 로마 제일의 시민이라는 뜻으로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로마의 구성원인 일개 시민이 되는 것이다.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특권을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 반환하겠다고 선포하여, 원로원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제 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가 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면에서 군단의 지휘권을 계속가지고 있었고, 여러 특권들을 계속 손에 쥐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원로원을 통해 하사받은 칭호를 사용함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특권들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력을 이용한 무언의 압력을 이용해, 원로원을 통해 여러 속주의 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으며, 집정관과 호민관, 최고 제사장의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어디까지나 로마법 안에서 인정되는 특권들을 누렸다. 대신 일부 속주들은 원로원이 통제할 수 있게 하였고, 로마법을 초월한 특권들은 내려놓음으로 로마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이렇게 실질적인 일인통치를 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제정 로마 전기의 정치형태를 '원수정'(Principatu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에 284년 로마 황제로 즉위한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집권기부터는 전제정(Dominatus)으로 부른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와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기원전 31년부터 사망할때까지 약 44년간 집권하였는데, 그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는 내용을 단순히 열거만 한다 하더라도 힘이 들 정도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법을 정비하고, 세금체제를 개편하였으며, 군단을 감축하고, 로마에 소방대와 경찰대에 해당하는 조직을 신설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로마 군단을 상비군의 형태로 개선하였는데, 이는 로마 함대에도 해당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항구적인 해군이 창설되었다. 로마에 근위대도 창설하였는데, 사실상 로마에 아우구스투스의 사병이 상시적으로 주둔할 수 있게되었으며, 이는 후에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외에도 공공사업을 진행하거나, 재해가 발생했을때 그 해결을 위하여 사비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국가 사업에도 이미 아우구스투스 개인에 대한 의존과 요구가 일반 시민들 사이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적으로도 동방의 파르티아를 견제하기 위해 인접 국가들을 회유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갈리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 '게르마니아' 지역에서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부터 사실상 로마의 외적은 북부의 게르만족을 포함한 이민족과 동부의 파르티아로 좁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혈연을 중요시하였고, 안정적인 통치와 후계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결국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할때, 아내와 전남편 사이의 자식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권력을 승계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권력의 부자승계는 로마의 공화정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 이기도 했는데, 이미 긴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간 동안 많은 주요 공화정 인사들이 사망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로마는 그러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 놓은 근위대의 무력이 이러한 권력 승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비록 이러한 권력의 승계는 완전한 혈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도, 완전한 전제적 군주정의 형태도 아니었지만, 이로서 로마의 공화정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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