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노예 검투사 반란자 「스파르타쿠스」
- 역사
- 2023. 3. 15.
로마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경에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있는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알려진 사실이 없다. 스파르타쿠스는 건장한 체격에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략이나 전술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 같기 때문에, 트라키아 지역 출신으로 생각되어지며, 로마가 트라키아 지역에서 벌인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병사나 혹은 지휘관급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 검투사들이 일으킨 반란과 그 경과에 대해 상당히 수치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을 꺼렸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된 기록도 남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실공히 당시 세계 최고의 국가였다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일어난 이런 이례적인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여, 스파르타쿠스를 주인공으로한 소설이나 영화같은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는 70여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하여, '베수비오 산'으로 숨어들었다. 베수비오 산은 화산으로 유명하지만, '폼페이'를 멸망시킨 분화는 기원후 79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는 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스파르타쿠스와 검투사들이 있었던 양성소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라는 사람이 관리하는 곳이었는데, 당시 양성소에는 200여명의 검투사들이 생활하고 있어, 상당히 비좁고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 같다. 산속으로 숨어든 검투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에 사실상 산적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카푸아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소규모 토벌대를 파견한 것 같은데, 검투사들은 이들을 격퇴하고, 전리품을 노획하여,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였고, 이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도망 노예나 불량배, 부랑자 같은 사람들이 합류하여 조금씩 세력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에 로마는 국가차원에서 대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렇다고 해도 로마의 인식으로는 사실상 도적때에 불과한 무리였기 때문에, 법무관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를 지휘관으로 하여, 로마 정규 군단이 아닌, 시민병으로 모집한 3,000명의 토벌대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경험도 없고 제대로된 훈련도 받지 못한 토벌대는 스파르타쿠스 일당에게 기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이에 로마에서는 다시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에게 4,000명의 시민병을 모집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바리니우스는 또 다른 법무관인 '루키우스 코시니우스'와 함께 파견되었는데, 병사를 나누어 각자 지휘하였다고 한다. 당시 로마에서는 전공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이런식으로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스파르타쿠스는 이들을 따로따로 공격하여 각개격파하였다. 연이은 전투에서 승리한 스파르타쿠스 일당은 노획한 장비와 물자로 풍족해 질 수 있었고, 또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퍼지면서, 로마 각지에서 이들에게 합류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는 '시칠리아'나 북아프리카에서 값싼 곡물이 대량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몰락한 중소 자영농민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런 사회에 불만을 가지게 된 주로 무산 계급들이 많이 합류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커진 세력은 기록에 따라 그 숫자는 다르지만 거의 1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제3차 노예전쟁)
세력이 급격하게 불어난 스파르타쿠스 일당은 베수비오 산을 벗어나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에게 합류할 만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거나, 주변 도시를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전해지는 내용에 따르면 로마 사회에 원한이 있던 구성원들이 점령한 도시에서 살인, 약탈, 강간, 방화같은 짓을 수시로 저질렀고, 스파르타쿠스는 이를 제지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측근에 해당하는 동료였던 '크릭수스'는 로마인들을 다 죽여야한다면서 스파르타쿠스와 의견이 달랐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이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스파르타쿠스는 그 신분적 위치 때문에 억압된 사회에 대한 반역자나, 신분이나 차별에 대한 철폐를 말하는 해방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러한 내용들이 실제로 그러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후 역사가들에 의해 그러한 방향성을 갖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어찌되었든 스파르타쿠스의 일당은 이때 상당히 잘 무장되어있던 것 같고, 또 합류하는 이들을 전사로 훈련시켜서, 상당히 강대한 세력으로 자리메김하면서 로마의 직접적인 위협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로마에 대한 반란군이 되었고, 기원전 72년 드디어 로마에서 그 해에 선출된 두명의 집정관을 모두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루키우스 갈리우스 푸블리콜라'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각각 로마의 정규 군단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는데, 이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로마 북쪽으로 이동하여 '갈리아' 지역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반란군은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세력과 크릭수스가 이끄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따로 분리되어 이동하고 있었 던 것 같다. 푸블리콜라는 '가르가노 산'에서 크릭수스가 이끄는 3,000명의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고, 반란군 중 약 2,000명이 전사하였으며, 크릭수스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렌툴루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반란군과 대치하였는데, 스파르타쿠스는 렌툴루스의 군단을 격파하였고, 이어서 푸블리콜라의 군단까지 격파하면서, 로마 정규 군단이 일개 노예 반란군에게 패배하는 치욕을 받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포로로 잡은 로마 군단병들을 시켜 검투 시합을 열게하여, 죽은 크릭수스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반란군들은 자신들의 진군을 방해하던 로마 군단을 모두 물리쳤기 때문에, 갈리아 지역이나, 아니면 트라키아 지역으로, 어느쪽이든 가고 싶은 곳으로 로마를 탈출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반란군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의 목적이 로마를 탈출하여 자유를 얻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그들은 다시 로마 내부의 적대적인 무력집단을 남게 되었기 때문에, 로마가 그들을 섬멸하던가, 아니면 그들이 로마를 정복하던가,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게 되었다.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
로마에서는 채면과 관련된 문제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로마의 위협으로서 이 반란군을 처리해야 했다. 기원전 71년 로마 원로원은 로마 제일의 부자인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지휘권을 주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크라수스는 전임 집정관들의 패잔병들과 사비를 들여 모은 병사들을 합쳐 약 4만명에 달하는 규모의 군단을 모집하였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본보기로 패잔병들을 군법으로 처벌하여, 로마군 최고의 형별인 '10분의 1형'(decimatio)을 집행하여, 엄격하고 잔인하게 군단을 조율하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로마 남쪽에서 배를 구해 시칠리아나 그리스 지역으로 탈출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히스파니아' 지역과 그리스 지역에서 전쟁을 끝낸 로마 군단이 속속 로마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이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미 로마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폼페이우스가 크라수스를 도와줬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폼페이우스가 직접 반란군을 토벌했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사실상 퇴로가 끊기게 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과 크라수스의 로마 군단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크라수스의 군단은 반란군에 비해 질적으로도 숫적으로도 우세했기 때문에, 힘으로 밀어붙여서 반란군을 섬멸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하지만, 그 시체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6,000명의 반란군은 본보기로서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고, 그 십자가들을 '아피아 가도'를 따라 죽 늘어놓았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자신이 세운 전공을 크게 퍼트리고 싶었겠지만, 로마 원로원에서는 로마 군단이 일개 반란군에게 고전한 것을 모욕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최대한 덮어두려고 했다고 한다.
현대의 스파르타쿠스
거대한 지배자, 혹은 지배세력으로 대표될 수 있는 로마와 싸운 스파르타쿠스는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공산주의 선언을 출판한 '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카스를 '고대의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로 평가하고 있으며, 독일에는 급진적인 공산주의 세력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이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의 시각으로는 노예이며 동시에 검투사이기도 했던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의 탈주와 반란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대에 흔히 생각하는 노예의 이미지가 유럽열강에 의해 자행된 아프리카 노예나, 식민지의 원주민들에 대한 착취 같은 내용에 맞춰져 있는데 비해, 당시인 고대시대의 노예들은 그래도 조금 나은 생활을 영위하였다. 물론 노예이기 때문에 주인에게 귀속되어 행동이나 거주의 자유가 제한 되기는 했으나, 일부 학식이 있는 그리스 노예들은 가정교사나, 회계사, 비서같은 산업이나 공직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보통 전쟁에서 지거나, 해적이나 도적들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징벌에 의해 한정된 기간동안 노예로 지내는 경우도 있어, 금전을 통해 그 소유권을 사고 팔기도 했지만, 노예를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고 동등한 인간으로 보았다. 물론 판매가 가능한 만큼 재산으로 취급되기는 했다. 애초에 고대사회였기 때문에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많이 부족하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노예에서 해방되는 방법도 다양하여, 주인이 구속을 해방해 주는 경우도 있었고, 노예로 생활하면서 받은 급료 등을 통해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해방받을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병사를 모집하기 위해서나, 인기가 있는 검투사 등도 해방되기도 했고, 후에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시켜서, 오늘날의 총리나 장관에 해당하는 자리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을 일정조건에 따라 본인이나 혹은 자녀들이 정식으로 로마 시민이 될 수도 있었다. 검투사 또한 마찬가지로 노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의 신분으로 직업 검투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애초에 현대의 영화나 여러 엔터테인먼트에서 다루는 것처럼, 죽음이 확정된 검투 시합 따위는 죄수들이나 극히 일부의 노예 검투사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당시의 검투 시합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쇼로서 전문 검투사들의 시합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사고에 의한 것 이었다. 또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력이 대단하거나, 인기가 있는 검투사들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후에 로마 시민 자격을 취득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로마 제국에 와서는 황제가 스스로 검투사를 자청하고, 프로 검투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의 스파르타쿠스와 노예 검투사들의 반란세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매우 적기 때문에, 스파르타쿠스 개인에 대한 어떤 평가는 내리기 힘들기 때문에, 독자들 개개인이 내린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소감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