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부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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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로마 최고의 부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15년경 '리키니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리키니우스 가문은 로마의 전통 귀족은 아니었으나, 초대 호민관 중 한명이 리키니우스 가문의 일원 이었으며,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으로 유명한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대표적이다. 크라수스의 아버지는 기원전 97년에 집정관에 당선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인데, 기원전 87년에 있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대표되는 평민파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로 대표되는 원로원파 사이에 일어났던 내전 중에 평민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후 크라수스는 로마를 탈출하여 '히스파니아'지역으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84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끝낸 술라가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올때, 크라수스는 술라의 진영에 합류하였으며, 로마로 입성하면서 로마 성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로마로 복귀하여 잃어버린 가문이 재산과 지위를 찾는데 노력하였다. 크라수스는 술라의 측근으로서 반대파들이 숙청되면서 몰수된 재산을 경매를 통해 헐값에 사들여서 판매하면서, 그 차익으로 많은 부를 모았다. 그 뿐만 아니라 크라수스는 상당한 사업수완이 있었던 것 같은데, 특출난 능력이 있는 노예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전문직 노예들을 알선하는 사업을 하였다. 또 설계상 문제가 있거나 화재 등으로 인해서 손상된 건물을 싼값에 매수하고, 수리하고 개축하는, 말하자면 부동산 리모델링 사업도 진행했는데, 이러한 사업 방식은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것으로, 크라수스의 사업수단이 상당히 시대를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외에도 당시의 소방서를 매수하여, 화재가 난 건물로 출동하는 것을 지연시키고서는, 불타고 있는 집 앞에가서 집 주인과 흥정하여, 불타고 있는 집을 헐값에 사서 사업을 하였다는 내용도 있는데, 상당히 기상천외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심해볼만 하다. 혹자는 크라수스가 오직 반대파의 숙청을 통해서만 돈을 벌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그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재산을 모아서, 후세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거의 로마의 일년 예산에 맞먹을 정도 였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이러한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많은 악평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의 정치계에서의 평판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당시의 고대 사회는 그리스나 로마에서 투표에 의해 권력자를 선출하는 등 초기 민주주의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지만, 공정 선거에 대한 의식이 많이 부족하여, 선동이나 금품살포, 선심성 공약 남발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 상대후보를 살해하기까지 하는 일들이 종종 자행되었기 때문에, 그는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자신과 자식들, 그리고 다른 원로원 의원들의 선거를 도와주는 등의 행위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스파르타쿠스 전쟁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술라도 사망하였지만 로마의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전 때문에 뒤로 밀어두었던 문제도 다시 터져나왔다. 기원전 79년 히스파니아 지역에서는 평민파의 생존자인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메텔루스 피우스'가 파견되었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합류하였지만 장기전이 되었고, 반란은 기원전 72년에 가서야 진압되었다. 또 그리스에서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계속 로마와 반목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75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로마에서는 명장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킬리키아'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대응하였는데, 이 전쟁도 쉽게 끝낼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74명의 검투사들이 집단으로 탈출하여, '베수비오 산'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로마에서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3,000명 규모의 토벌대를 조직하여 보냈는데, 토벌대가 검투사들에게 패하면서, 이 소문을 들은 몰락 농민이나 탈출 노예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어 10만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탈출 노예들의 지도자였던 스파르타쿠스는 검술 뿐만 아니라 전술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심각성을 인지한 로마에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를 지휘관으로 파견한 정규 로마 군단도 격파하였으며, 노획한 장비로 무장을 한 노예들은 반란군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처음에는 이탈리아 북쪽으로 향했는데, 이는 '갈리아' 지역으로 탈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2년 로마에서는 두명의 집정관인 '루키우스 갈리우스 푸블리콜라'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가 모두 군단을 이끌고 토벌을 시도하였다. 일년간 일부 반란군을 섬멸하기도 하였으나, 가시적인 성과는 얻지 못하였고, 반대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군단을 따돌리거나 격파하였으며, 그대로 이탈리아 내부를 거리낄것 없이 휘져었다. 기원전 71년에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가있었고, 로마 원로원은 당시 법무관이었던 크라수스에게 군단을 주어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미 충분한 만큼 부를 축적한 크라수스는 이번에는 명예를 쌓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데, 매우 악랄한 방법으로 진압했다고 한다. 먼저 첫 싸움에서 패배하자, 도망친 로마 군단의 병사들을 잡아다 본보기로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란군보다 크라수스에게 두려움을 느낀 군단의 병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반란군 토벌에 임했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반란군을 산속에 몰아 넣는데 성공하였지만, 쉽게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히스파니아에서는 폼페이우스가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하였고, 루쿨루스도 '마케도니아'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하였다고 한다. 이에 크라수스는 자신의 공을 빼앗길까 우려하여 병사들을 크게 다그쳤고, 반란군을 잔인하고 무차별적으로 몰아부쳐서 괴멸시켰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찾지 못하였지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포로로 잡은 6000명의 반란군은 잔인하게 십자가형으로 처벌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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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정치(Triumviratus)

세계적으로 유명한 삼두정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9년 당시 로마의 유력자 였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의 세사람은 비밀리에 협약을 맺고, 서로를 정치적으로 지원하면서 원로원을 견제하기로 합의하였다. 사실 이 합의가 성립된 것은 상당히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당시 로마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하였다. 카이사르는 바람둥이로 매우 유명하였는데, 그는 폼페이우스의 아내 뿐만 아니라 크라수스의 아내와도 연애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금전적으로 크라수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폼페이우스는 5년간 로마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정치계에서 입지가 매우 빈약하였는데, 로마에서 그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여러 정책을 시행시키기 위해서 도움이 절실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도움을 원하였고, 크라수스의 경우는 카이사르에게 빚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카이사르가 성공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인기를 이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카이사르는 이 협력을 통해 59년에는 집정관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갈리아 총독으로 10년간의 '갈리아 원정'을 지휘하였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5년에 동시에 집정관 자리에 올랐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퇴역병을 위한 토지배분에 관한 법을 관철시킬 수 있었고, 히스파니아에서의 지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크라수스는 시리아 속주의 총독 자리를 차지하였다. 단순히 나열한 것만으로는 크라수스가 삼두정치를 통해서 얻은게 별로 없어보이긴 하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으로 크라수스의 빚을 갚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도 얻은 것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파르티아 원정과 죽음

로마의 동방 속주는 오래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무역의 중심지에도 해당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영토 중에서도 상당히 부유한 지역에 속했는데, 크라수스에게 이런 점은 큰 메리트가 되지 못 했을 것 같다. 그보다는 명예를 얻는 것을 더 중시한 것 같은데, 삼두정치의 파트너이자 동시에 정치적 라이벌의 위치에 있기도 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통해 많은 명예를 누렸고, 폼페이우스도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진압하거나, 지중해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동방 지역을 정복하면서 군공을 쌓은 것에 비해, 크라수스는 그의 부에 비해 얻은 명예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 되자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군사적 업적을 충족시키려고 한 것 같다. 원로원은 이 전쟁에 반대하였지만 삼두정치의 파트너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을 얻어 전쟁을 관철시켰으며, 페르시아의 왕 '오로데스 2세'의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제안도 거절했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4만명에 달하는 군단을 모집하여 파르티아로 진격하면서, 인접국인 '아르메니아'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로데스 2세는 이를 간파하고, 자신은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고, 장군인 '수레나스'에게 병사를 주어 크라수스를 막도록 했다. 아르메니아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막을 따라 급격하게 진격한 로마 군단은 곧 사막 한가운데서 파르티아 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카르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는 약 1만명으로 로마 군단은 숫적으로 우세하였지만, 메마른 사막지역에서 지형과 기후의 불리함을 않고 싸워야했다.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로마 군단은 불리한 지형에서 사막의 고열로 인한 더위와 목마름과도 싸워야 했고,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전사했고, 크라수스도 수레나스가 제안한 회담에 참여했다가 살해당하였다.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에서 지휘관을 잃은 로마 군단은 완전히 괴멸되었고, 4만명의 병사들 중 2만명이 전사하고, 1만명은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남은 1만명만이 무사히 시리아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로마의 큰 패배중 하나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삼두정치는 막을 내리고, 권력의 저울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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