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든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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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팔미라의 왕비

'제노비아'는 240년경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에 속한 도시 '팔미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내용은 없으나, 승마와 사냥을 즐겼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적 지휘가 있는 가문의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동서양의 문화가 충돌하는 무역이 활발한 지역의 출신 답게, 이집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시리아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255년경 그녀는 14세에 같은 팔미라 출신의 유력자인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와 결혼 했다. 260년 로마 제국의 황제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와의 '에데사 전투'에서 패해 포로로 잡혔고, 이후 승기를 잡은 페르시아는 대대적으로 로마 제국이 동부로 쳐들어왔다. 당시 로마 제국은 내외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었는데, 이에 동방의 기병대 지휘관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남은 로마 군단을 수습하여 대응하였고, 오다에나투스도 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대의 공격은 막아내었지만,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는 로마에 반역하여 황제에 즉위하였고, 곧 로마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되면서 로마 제국의 단독황제가 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기병대 지휘관인 '아우레올루스'를 파견하여 진압하게 하였으나, 로마 제국에는 동방을 안정시키고 페르시아를 막아낼 여력이 부족하였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오다에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권한을 주어 동방을 안정시키도록 하였다. 사실상 동방 총사령관이 된 오다에나투스는 맹활약을 펼쳤는데, 262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속주의 '에데사'와 '카르헤'를 탈환하는 등 페르시아를 제국의 영토 밖으로 밀어내고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아왔다. 그 이후에는 페르시아 영토까지 쳐들어가 '크테시폰'을 포위하고 일대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는 이때 받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못했다고 하며, 팔미라로 귀환한 오다에나투스는 장남인 '셉티미우스 헤로디아누스'(하이란 1세)와 함께 팔미라의 왕위에 올랐다. 이처럼 한때 반란세력에 가담했던 오다에나투스였지만, 로마 제국과 갈리에누스에게 계속 충성하면서 주변 속주의 총독들과도 잘 협력하였기 때문에, 동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267년 오다에나투스는 '카파도키아'까지 쳐들어온 '고트족'을 몰아내고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조카 '마에오니우스'에 의해 아들 하이란 1세와 함께 암살당했다. 그 직후 마에오니우스는 처형되었고, 팔미라의 왕위는 오다에나투스의 다른 아들인 '셉티미우스 바발라투스'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어린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인 제노비아가 대신하였다. 이 암살은 평소에 경박한 행동으로 오다에나투스에게 질책을 많이 당했던 마에오니우스가 앙심을 품고 저질렀다고 하는데, 다른 이야기로는 제노비아가 하이란 1세 대신 자신의 친아들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 벌인 음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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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의 능력과 야심

제노비아는 남편인 오다에나투스 못지 않게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언어적 재능뿐만 아니라 '호메로스'나 '플라톤'의 책에 서평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똑똑했다고 한다. 또한 체력적으로 강해서, 몇 시간 동안 병사들과 같이 행군할 수 있을 정도이고, 오다에나투스와 함께 전장에 서기도 했다고 한다. 제노비아는 팔미라를 지배하면서 겉으로는 로마 제국에 따르면서, 뒤로는 페르시아와 동맹하는 등, 제국의 동방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다 270년에 '셉티미우스 자브다스'를 팔미라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서 본격적으로 야심을 들어내었다. 아라비아 속주로 쳐들어가 '보스트라 전투'에서 로마 군단을 물리치고 아라비아 총독을 살해하였고, 유대 속주도 장악하였으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도 점령하였다. 271년에는 이집트를 완전히 장악하고, 시리아 속주로 쳐들어갔으며, 소아시아 지역까지 진출하여 '아나톨리아'의 상당부분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당시 로마 제국의 3대 도시라고 할 수 있는게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인데, 그 중 무려 두개의 도시를 팔미라가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력만을 놓고 보자면 이시기에는 팔미라가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된 셈이다.

팔미라 제국의 멸망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는 270년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국의 서쪽에는 '갈리아 제국'이 있고, 북쪽에서는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동쪽에서 팔미라가 날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권후 2년여에 걸쳐 북쪽 전선을 안정시키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동방 원정을 실시하였는데, 부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시켜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공략하게 하였고, 자신은 군단을 이끌고 직접 소아시아 지역을 통해 동방 지역으로 들어갔다. 아우렐리아누스가 본격적으로 동방 원정을 실시한 이유는, 제국 경제의 거점인 동방 지역에서 팔미라가 영향력을 확대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겠으나, 이 시기 팔미라에서 로마로 공급되는 이집트의 곡물 수출을 막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이때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대항하기 위해, 동방 지역의 지배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아들인 바발라투스와 함께 황제를 자칭하며 대항하였기 때문에 '팔미라 제국'은 272년에 생긴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 군단은 팔미라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략하면서 원정을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로마 군단의 연전연승과 함께 패배한 도시들에 대한 아우렐리아누스의 관대한 처분이 더해지면서, 팔미라 제국에 소속된 도시들의 결속력이 약해졌다. 사실 각각의 도시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은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팔미라 제국의 기치아래 결집되어야 할 별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승자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기도 하고, 이런 이유로 특히 아우렐리아누스의 관대한 처분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자브다스가 지휘하는 팔미라 군대는 로마 군단에게 계속 패배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맞서지 못하고 팔미라로 후퇴하게 된다.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팔미라까지 몰린 제노비아였지만, 그의 항복 권고는 거절하였다. 그녀는 무더운 사막의 여름과 페르시아에서 도착할 원군을 기대하고 있던 것 같지만, 당시 페르시아는 샤푸르 1세가 사망하면서 혼란스러운 시기가 되어 팔미라를 도울만한 여력이 별로 없었다. 또한 이집트가 프로부스에게 함락되면서 로마 군단의 기세는 더 높아졌다. 결국 제노비아는 성문을 나와 도주하였고, 자브다스는 성문을 열고 항복면서 팔미라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이후 자브다스는 전쟁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으며, 바발라투스는 이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처형됬다고 하기도 하며, 제노비아와 같이 살아남았다고도 한다. 제노비아는 팔미라를 버리고 도주하였으나, 로마 군단의 병사들에게 생포되었고, 로마로 끌려가서 274년에 벌어진 아우렐리아누스의 개선식에서 전리품으로 공개되었다. 그러나 개선식 이후에는 로마 근교의 별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주었고, 그녀의 딸들은 로마의 귀족들과 결혼했다고 한다. 역사에서 주로 활약하는 것은 남성들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역사의 전면의 등장하는 경우에는 주로 악녀인 경우가 많지만, 제노비아는 악녀라기보다는 일종의 여걸에 비슷한 느낌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결국 몰락하여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잡힌 제노비아 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아우렐리아누스는 3년후인 275년에 부하들에 의해 암살된 반면, 제노비아는 오랫동안 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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