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분열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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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인근 지도

포로가 된 황제와 제국의 분열

260년 로마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가 공동 황제로 협동 통치의 형식으로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두 황제는 각각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발레리아누스가 동부를, 그리고 갈리에누스가 서부를 중점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로마 제국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로, 제국의 외적인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내부의 반란에도 신경써야 하는, 통치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페르시아와의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 군단이 패배하여,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혀가면서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갈리에누스는 로마 제국의 단독황제가 되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이자, 공동 황제였던 발레리아누스는 적국 페르시아의 포로로 잡혀갔으며, 동시에 두명의 황제가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제국을 혼자서 지탱하게 된 것이다. 갈리에누스는 동분서주하면서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260년에 '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갈리아 제국'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270년에는 시리아 속주의 도시였던 '팔미라'를 중심으로 '팔미라 제국'이 설립되면서 분열되었다.

갈리아 제국

갈리아 제국은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에 의해 로마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였다. 포스투무스는 발레리아누스에 이해 '게르마니아' 전선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던 것 같은데, 갈리에누스가 발란을 진압하기 위해 발칸 반도쪽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갈리아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갈리아 지역을 약탈하던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 그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의 처리방법을 놓고 분쟁이 생겼다. 곧 전리품을 원하던 군단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던 갈리에누스의 후계자를 잡아 처형하였다. 이때 눈여겨 볼 점이 있는데, 포스투무스는 이전까지의 로마 제국의 반역자들과 다르게 로마 황제를 자칭하지 않고, 새로 자신의 제국을 세우고 로마로 부터 분리독립을 했다는 것이다. 갈리에누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처형한 반역자 포스투무스를 당장 단죄하고 싶었겠지만,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동시에 다행이었던 것이 포스투무스가 갈리아 제국으로 분리독립하였기 때문에, 이 반란은 당장 제국이 내전으로 번지지 않았고, 갈리에누스는 제국을 추수를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갈리아 제국은 갈리아 지방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갈리아 전역을 지배 영역으로 하였으며, 갈리아 제국의 원로원을 따로 신설하고, 집정관을 세웠으며, 근위대까지 만들어서 로마 제국의 제도를 따라하였다. 261년에는 포스투무스가 직접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회유하였으며, 이후 '히스파니아' 지역까지 갈리아 제국에 합류하였다. 265년에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갈리에누스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반란 진압을 명목으로 갈리아 제국을 쳐들어갔지만, 큰 성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결국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이 게르만족의 갈리아 지방 침략을 방어하고, 로마로 쳐들어오지 않는 다는 것을 조건으로 갈리아 제국의 존속을 묵인하기로 하였다. 268년에는 갈리에누스의 기병대 지휘관이었던 '아우레올루스'가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갈리아 제국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갈리에누스는 이 반란의 진압 과정 중에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269년에 '모군티아쿰'(현재의 마인츠)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포스투무스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전투 후 약탈을 하려는 부하들을 저지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이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를 갈리아 제국의 새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는 집권한지 채 일년도 되기 전에, 갈리아 제국의 근위대장이었던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가 일으킨 반란군에 의해 처단되었다. 그리고 빅토리누스는 갈리아 제국의 세번쨰 황제로 즉위하였다. 270년에는 히스파니아 지역이 갈리아 제국에서의 이탈을 선포하고, 다시 로마 제국으로 돌아갔으며, 271년에는 빅토리누스가 부하의 아내를 유혹하였다가, 그로 인한 원한으로 부하에게 암살당하였다. 이에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가 '테트리쿠스 1세'로 갈리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272년에 아들을 '테트리쿠스 2세'로공동 황제로 선포하였다. 이후 274년 다시 로마 제국에 복속되기 전까지 제국 내부의 통치와 안정에 집중하였으며, 갈리아 제국 성립 이후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가려는 시도는 한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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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라 제국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승리한 페르시아의 군대는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공격했는데, 로마 군단의 기병대 대장이었던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잔존 병력을 모아 이에 대항하였고, 팔미라의 기병대 대장이었던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도 이에 합류하였다. 이에 페르시아 군대가 격퇴되자, 동방의 로마 군단은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에게 황제로 취임할 것을 권하였는데, 그는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이 권유를 거절하고, 대신 그의 두 아들 '티투스 플라비우스 이우니우스 마크리아누스'(소 마크리아누스)와 '티투스 풀비우스 유니우스 퀴에투스'가 공동 황제로 취임하였다. 이후 로마쪽으로 진군했던 반란 세력은 갈리에누스가 진압을 목적으로 파견한 아우레올루스에 의해 격파 되었지만, 갈리에누스에게는 혼란스러운 동방을 완전히 진압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오다에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동방을 안정시키도록 하였다. 오다에나투스는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동방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페르시아의 잔존 군대를 몰아내었으며, 262년에는 페르시아에게 빼았겼던 로마 영토를 모두 되찾아왔다. 263년 경에는 역으로 페르시아로 쳐들어가 '크테시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고 한다. 갈리에누스는 이 공로로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런 오다에나투스의 활약과 충성은 갈리에누스에게는 대단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오다에나투스의 지위도 상당히 공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다에나투스는 이후 팔미라로 귀환하여, 장남 '셉티미우스 헤로디아누스'(하이란 1세)와 함께 팔미라의 공동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런 로마 제국의 좋은 분위기는 단번에 뒤집히는데, 267년 '카파도키아'까지 쳐들어온 '고트족'을 격파한 후에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이던 중 오다에나투스와 하이란 1세는, 오다에나투스의 조카인 '마에오니우스'에게 암살 당하였다. 이 암살은 오데나투스의 아내 '제노비아'가 하이란 1세가 아닌, 자신의 친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위해 꾸민 음모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암살범인 마에오니우스는 제노비아에 의해 처형되었고, 제노비아는 아들 '셉티미우스 바발라투스'를 팔미라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섭정으로 통치를 시행했다.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을 따르며, 페르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동방을 안정시키는 척하면서, 뒤로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270년에 팔미라 제국을 선포하고, 제노비아와 바발라투스가 공동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셉티미우스 자브다스'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지역을 침공하였다. 팔미라가 로마 제국과 떨어져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은 제노비아가 권력을 잡은 시점부터로 생각해볼 수 있으나, 실제 팔미라 제국을 선포하고 로마로부터 분리 독립을 하여, 로마가 삼국으로 분열된 시기는 상당히 짧다.

로마 제국의 재통합

270년 로마에서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취임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가 어느정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용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 로마 북쪽의 게르만족의 위협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272년 팔미라 제국이 이집트에서 로마로 운송되던 곡물 수출을 막으면서, 팔미라는 로마의 가장 시급한 적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미 2년여에 걸쳐 게르만족의 침입을 어느정도 차단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직접 군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원정을 시작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직접 소아시아지역을 시작하여 팔미라 제국을 공략하였고, 부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시켜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공략하게 하였다. 로마 군단의 연이은 승리와 아우렐리아누스의 관대한 처치에 팔미라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도시들의 민심이 로마 제국쪽으로 돌아섰고, 제노비아는 팔미라에 고립되었다.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의 항복 권고를 무시하고 농성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바랬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 페르시아는 샤푸르 1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타국을 지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제노비아는 팔미라를 포기하고 달아났으나 로마 군단에게 생포되었다. 이때 팔미라 도시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이후 제노비아의 친척이 다시 한번 팔미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면서 파괴되어, 그대로 몰락하였다고 한다. 동방 지역을 다시 제국의 품으로 되찾아온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번에는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274년 로마 군단과 갈리아 제국의 군대가 대치하였고, 아우렐리우스는 협상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협상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갈리아 제국의 황제인 테트리쿠스 1세와 테트리쿠스 2세는 로마 제국으로 귀순하였는데, 오히려 병사들은 이를 보고 배신자라고 비난하면서 항복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성공적인 협상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단은 치열한 전투 끝에 갈리아 제국을 다시 로마의 손으로 되찾아왔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의 행정 관료들이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서, 갈리아 지방을 통치하게 하였고, 로마에 적대적이지 않은 도시들에게는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이로서 3개의 제국으로 나뉘었던 로마 제국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포로로 잡혔던 제노비아와 테트리쿠스 부자는 로마로 이송되어 개선식에 황제의 전리품으로 공개되었지만, 이후 모두 사면받았으며, 제노비아는 로마 근교의 별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락되었고, 테트리쿠스 부자는 원로원 의원에 복귀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후 로마 속주의 총독을 역임하는 등 로마 제국에서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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