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
- 역사
- 2023. 3. 4.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군인 황제 시대
235년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당하고,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 로마 황제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나 로마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황제가 추대되는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긴 하였지만, 이 사건을 기점으로 235년부터 284년까지의 시기를 '군인 황제 시대'라고 한다. 약 50년에 걸친 이 시기에는 무려 26명에 달하는 황제가 등장하였고, 로마 제국은 외적의 침략과 내전, 역병 등의 상당한 혼란에 휩싸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3세기의 위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군인 황제 시기의 첫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로마 제국의 변방인 '트라키아' 지역의 유목민 출신으로, 일반 병사부터 시작하여 황제가 되었다. 단순히 병사들 사이의 인기에 의해서 황제가 된 그는, 제대로 된 공직을 거친적이 없고, 정치와 법률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어는 커녕 로마의 공통어 였던 라틴어 조차 서툴렀다. 오랫동안 로마 군단에서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의범절도 부족하여, 로마 사람들은 그를 트라키아 촌놈이라는 뜻으로 트락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연하게도 로마의 원로원에서도 이런 정통성도 없는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원로원은 세베루스 왕조를 지내면서 이미 황제의 정책 시행을 위한 도구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황제도 거부하지 못하고 취임을 승인하였다.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출신이나 신분 때문에 로마 사회에서 상당한 차별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황제로 즉위한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계속 머물면서 로마로 귀환하지도 않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는 로마에 큰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하였고,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황제의 명령으로 많은 세금들이 징수되었다. 또한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이에 대해 반발하는 원로원 의원이나,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 인물들은 여러 이유를 대고 무자비하게 숙청하였기 때문에, 로마 뿐만 아니라 여러 속주들에서도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여섯 황제의 해
238년은 한해 동안 황제가 여섯명이나 등장하기 때문에 '여섯 황제의 해'로 불리운다. 3년여간 계속된 막시미누스 트락스이 통치로 인해 로마 제국의 혼란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결국 세금 징수에 대한 불만으로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북아프리카 지역이 농장주들이 세금징수관을 살해하고,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셈프로니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여 '고르디아누스 1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순수한 통치에 대한 불만이었다기 보다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으로 반란을 사주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신의 아들을 '고르디아누스 2세'이자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원로원이 정식으로 황제로 선포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할 필요가 있었던 원로원은 그들의 황제 취임을 승인하고,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1세는 로마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평소에 자신과 갈등을 벌였던 '누미디아'의 총독인 '카펠리아누스'를 먼저 정치적으로 제거하려고 하였다. 결국 카펠리아누스는 반란 진압의 명목으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로마 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갔으며,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일으면서, 반란은 어이없이 끝나게 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군단을 이끌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로마로 쳐들어오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소식을 듣게된 원로원은 한때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로마에 도착하게 되면 사실상 모두 처형될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원로원은 다시 한번 타계책을 생각해 내었다. 먼저 유능한 원로원 의원인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데미쿠스 카엘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피우스'를 황제로 선포하고, 푸피에누스는 군사적 경험이 많은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막기 위해 부대를 모아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하였고,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아서 행정을 담당하면서, 혼란을 수습하고 보급을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이와중에 로마에 있던 고르디아누스의 지지자들이 원로원이 마음대로 황제를 세운것을 문제 삼았는데, 그들은 고르디아누스의 혈통에서 추가로 새 황제를 선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피우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여 '고르디아누스 3세'가 되면서, 6명의 황제로 한해 동안 공존하게 된 것이다. 군단을 이끌고 내려온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푸피에누스와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싸웠는데,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제대로 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전투가 길어지자, 병사들이 배반하여 그를 살해해버렸다. 이렇게 로마의 적이 어이없이 사라져버리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반목하기 시작했다. 이 경험 많고 경력이 뛰어난 원로원 의원 출신의 황제들은 서로가 서로보다 났다고 여기며, 서로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이러한 행동을 바로 곁에서 보고 있던 근위대 병사들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근위대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이 암살에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개입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하여 여섯황제의 해가 끝나면서 무려 다섯명의 황제가 죽고, 13세의 소년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단독 황제로서 로마를 통치하게 되었다.
소년 황제와 근위대
로마는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황제의 어머니와 친척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그러나 정통성도 없고 지지세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상당부분은 이전 황제들 때부터 근무했던 관료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통치는 241년 고르디아누스 3세가 결혼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게 된다. 코르디아누스 3세는 '푸리아 사비니아 트란퀼리나'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가이웃 푸리우스 사비니우스 아퀼라 티메시테우스'로, 젊은 시절부터 여러 공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상당히 능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아래에서도 상당히 중용되었으며, 막시미누스 트락스가 즉위한 이후에도 숙청당하지 않고, 사실상 동방 지역의 속주들을 관리하는 총잭임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황제의 장인이 된 티메시테우스는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로마 제국이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티메시테우스는 뛰어난 행정가로서, 가족이 된 황제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티메시테우스는 출신과 관계없이 여러 원로원 의원들을 포섭하였고, 근위대의 권한을 강화하여 자신의 권한을 늘리면서, 동시에 현 황제 자리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로마의 혼란은 쉽게 가라앉히기 어려웠으며, 근위대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다시 근위대의 권력에 대한 개입을 우려해야하는 방향으로 이행되었다. 또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에 대한 복수로 누미디아에 있던 로마 군단을 강제로 해산시켰는데, 이 틈을 타서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로마의 틈을 또 다시 찌른 것이 '페르시아'였다. 당시 페르시아는 '사산 왕조'의 왕중의 왕이라고 평가 받는 '샤푸르 1세'가 집권하였는데, 로마의 동방 영토로 편입되었던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3세는 직접 동방 원정을 떠나게되었다. 황제의 친정이었지만 실상은 티메시테우스의 원정이었는데, 그의 지휘아래 로마 군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나 페르시아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243년에 티메시테우스가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사인은 병사로 알려져있지만, 일부 암살의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총지휘관을 잃게된 로마 군단이었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를 주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9세의 경험없는 어린 황제의 지휘는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244년 고르디아누스 3세가 사망하고, 그의 근위대장이었던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가 병사들에 의해 화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최초로 로마 황제가 된 아랍인이 었고, 그 때문에 '필리푸스 아라부스'라고 불리웠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사망하게 된 사건은 그 내막이 불분명한데, 일설에는 근위대장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가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쪽에서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던 중 낙마하여 사망하였고, 이에 따라 병사들이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황제가 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빨리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의 승인을 받고 정식 황제가 되고 싶어했고, 이에 샤푸르 1세와 평화 협정을 맺기로 하였다. 이 로마와 페르시아의 평화협정은 사실상 로마의 패배나 다름 없는 조건이었는데, 로마가 점령한 모든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돌려줬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까지 지불하였다.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 없었던 전쟁을 이런 방식으로 끝내야 했던 로마 군단의 병사들과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세금 부담을 떠안게된 동방의 속주들에서는 상당한 불만이 쌓이게 되었는데, 이는 마치 로마 최초로 근위대장에서 황제가 된 '마르쿠스 오펠리누스 마크리누스'를 떠올리게 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형인 프리스쿠스를 동방 총독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바로 로마로 향했다. 로마 원로원에게 황제의 자리를 승인 받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없던 정통성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전 황제의 암살 주모자로 의심받을 수 밖에 없는 위치였기 때문에, 먼저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원로원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로마 군단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막대한 보너스도 지급하였는데, 이로 인해 또 다시 세금 문제가 발생하였다.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다뉴브 강' 근처에서 '카르피족'을 몰아내는 등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로마의 외적문제는 계속 되었다. 248년에는 로마 건국 천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다.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의 침략이 계속되었고, 동방에서는 과다한 세금부담 문제로 폭동이 발생하였는데, 이 와중에 다뉴브 강의 로마 군단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리누스 파카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반란일으켰다.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다뉴브 강 방면 사령관인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데키우스'에게 진압을 명령했는데, 데키우스는 반란은 진압하였지만, 249년이 되자 이번에는 자신이 황제로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키고서는 로마로 진군했다. 이에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군대를 모아서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부하들에게 버림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후계자이자 공동황제였던 아들은 근위대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데키우스의 승전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그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로마의 적, 게르만족과 페르시아
데키우스는 로마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원로원으로부터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황제로 즉위하자, 로마 제국이 된 이후에 서서히 사라져버린 감찰관 직위를 부활시키고, 로마의 공공 건축물들을 복구하고 신규 건축물을 건설하게 하였다. 또 영향력이 약화된 로마의 다신교를 부흥시키기 위한 정책을 폈는데, 이 정책에 비협조적인 기독교인들이 박해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250년 '고트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서 로마의 영토로 침략해 왔다. 이에 데키우스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251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로마 군단은 초기에 우세하였으나, 습지대에서 지형적 이점을 살린 고트족의 공격으로 패배하였고, 이 전투에서 데키우스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이며, 공동 황제였던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전사하였다. 데키우스는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첫 로마 황제가 되었다. 데키우스가 죽음으로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모이시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비비우스 아피니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다음 황제로 로마 군단의 추대를 받았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데키우스의 둘째 아들인 '호스틸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공동 황제로 선포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도 정통성이 없는 황제로, 고트족과의 전쟁을 지속하는 것보다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에 의해 정식 황제로 승인 받는 것이 더 중요했는데, 사실 로마는 이미 누구나 무력이나 정치적 음모로 황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은 중요한 가치가 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정식 승인을 받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언제 어디서라도 경쟁자가 등장 할 수 있는 내부적인 위험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도 고트족과 매우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기로 하였고, 이는 전임인 데키우스 황제의 영웅적인 전사와도 비견되어 상당한 불안요소가 될 수 있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로마에 도착했을때는 마친 전염병까지 돌았는데, 호스틸리아누스는 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볼루시아누스를 공동황제로 선포하여 권력을 공공히 하였다. 새 황제가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시민들이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나, 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253년 동방에서는 샤푸르 1세의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였으며, '바르바리소스'에서 그곳에 있던 로마 군단을 섬멸하기도 하였다. 북쪽에서도 많은 전리품을 얻고 로마에서 돌아온 고트족을 보고, 다른 게르만족들이 로마를 침략하였다. 이에 모이시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 군단을 모아 게르만족들을 격퇴하였고, 고트족에게 제공하기로 되어있던 황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에 군단의 병사들은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이 틈을 타 고트족이 다시 로마를 침략하였는데, 옛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키'까지 약탈하였다고 한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급히 병사들을 모아 대응하였으나, 게르만족과 싸우던 정예 병사들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였고, 결국 배신한 부하들에 의해 아들 볼루시아누스와 함께 살해되었다. 로마에 도착한 아이밀리아누스는 원로원에 의해 정식 황제로 승인되었다. 이때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지원하기 위해서, 게르마니아 전선의 로마 군단을 규합하고 있었는데,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로마로 진군하였다.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양자의 전력차가 너무 컸다. 곧 아이밀리아누스의 부하들이 배신하였고, 아이밀리아누스는 황제가 된지 약 3달만에 살해되었다.
페르시아의 포로가 된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로마로 입성하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정식 황제로 승인되었다. 당시 58세였던 황제는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였다. 이로인해 로마 도시는 안정되었지만, 로마 제국은 북쪽과 동쪽에서 계속 공격받고 있었다. 발레리아누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제국의 서부와 게르만족의 문제를 맡기고, 본인은 동방과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명목상의 공동황제가 아닌 실질적으로 두 황제가 협동하며 통치하는 형태였는데, 로마의 유서깊은 리키니우스 가문의 출신 황제의 이런 통치 방식은 마치 로마 공화정 시대의 두명의 집정관 체제를 떠올리게 한다. 254년 발레리아누스는 원정을 떠나 동방에서 군주를 참칭하고 있던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삼피게라무스)를 진압하고, '안티오키아'로 가서 파르티아군을 격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지역과 '라인 강' 일대에서 여러 게르만족들을 물리치고 전선을 안정시켰다. 260년 갈리에누스는 '판노니아' 지역 로마군 사령관인 '잉게누우스'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고, 발레리아누스는 다시 페르시아와 치열한 전쟁을 재개하고 있었다. 당시 발레리아누스가 지휘하던 로마 군단에는 전염병이 돌았던 것 같은데, '에데사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전세가 기울자 발레리아누스는 샤푸르 1세에게 평화협정을 요구하였는데, 샤푸르 1세가 협정에 응하는 척 하면서 발레리아누스를 유인하여 생포하였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는 처음으로 포로가 된 로마 황제가 되었으며, 결국 생전에 로마로 귀환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포로로서 끌려다니며 온갖 수모를 당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를 박해했기 때문에 수치스럽게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리시아', '카파도키아' 등 36개 도시를 급습했는데,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로마 군단의 잔존 병력을 수습하여, 기병 지휘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 등과 함께 막아내었다. 이런 활약으로 동방 군단은 마크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려고 하였는데, 그는 고령과 건강의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대신 두 아들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이우니우스 마크리아누스'(소 마크리아누스)와 '티투스 풀비우스 유니우스 퀴에투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또 발칸반도 지역에서는 '일리리쿰' 방면의 로마 군단 지휘관이었던 '레갈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록솔라니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분열되는 로마 제국
아버지인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에누스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사방에서 게르만족이 쳐들어왔으며, 제국의 이곳 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 였을 것이다. 이번엔 갈리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갈리아 방면군 지휘관이었던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는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취임하였고, 갈리아누스의 후계자였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살로니누스 발레리아누스'를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이전과는 달랐는데, 포스투무스는 '갈리아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기존의 반란들이 로마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로마 제국의 황제를 목표로 한 것과 다르게 로마 제국의 영토 일부를 가지고 독립한 형태를 취한 것이다. 261년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하여, 마크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반란군은 크게 패하여 마크리아누스와 두 아들을 살해하였지만, 동방을 완전히 진압하고 페르시아를 견제하기에 여력이 모자랐던 갈리에누스는 오다에나투스를 사면하고, 동방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262년에는 이집트에서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집트는 로마의 중요한 식량공급지였기 때문에 '아우렐리우스 테오도투스'를 급히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였고, 아이밀리아누스는 처형되었지만, 후에 테오도투스 또한 반란을 도모하다가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265년에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더 이상 로마에 여력이 없는 것을 인정하고, 갈리아 지역의 방어를 계속하는 수행하는 것으로 갈리아 제국의 존속을 묵인하게 되었다. 267년에는 게르만족이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는데, 흑해를 건너 발칸 반도를 유린하면서 그리스의 도시들을 파괴하였고, 함대를 구축하여 지중해 일대의 해안 도시들도 약탈하였다고 한다. 한편, 갈리에누스로부터 동방 일대를 맡겨졌던 오다에나투스는 페르시아를 완전히 몰아내고, 자신의 근거지인 '팔미라'에 귀환하여 장남 '셉티미우스 헤로디아누스'(하이란 1세)와 함께 공동으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갈리에누스에게 충성하였으며,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들에게도 협조하였다. 267년 오다에나투스와 하이란 1세는 연회중 조카인 '마에오니우스'에게 암살되었는데, 팔미라의 왕비 '제노비아'가 마에오니우스를 처형하고, 아들인 '셉티미우스 바발라투스' 후계자로 내세웠다. 이들은 후에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동방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로마의 여러 동방 속주를 점령하여 '팔미라 제국'을 선포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은 3개로 분열되게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로마를 지키면서도, 여러 개혁을 수행하고, 권력 유지와 계승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268년 반란 진압에 앞장서고 있던 아우레올루스가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갈리에누스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되었다. 그가 암살된 이유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당시의 혼란한 상황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그 뒤를 이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고트족을 섬멸한 것에 대한 존칭을 붙여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불리웠다.
아우렐리아누스의 로마 재통합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일리리아 출신으로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휘하에서 로마 제국의 고위직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그러한 출신 때문에 로마의 중앙 정치권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러나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상당한 정치적 수완을 가졌던 것 같은데, 사실상 그가 갈리에누스의 암살 주모자로 의심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갈리에누스의 지지자들과 원로원 사이에서 뛰어난 정치적 면모를 보여준 것 같다. 그는 원로원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며, 동시에 전통적인 로마 귀족들과 새로운 로마 신흥 귀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269년에 아우레올루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군단이 자리를 비운 틈을타서 다시 쳐들어온 고트족을 대대적으로 섬멸하였다. 로마 군단은 살아남은 고트족을 추격하여 '하메무스 산맥'에 몰아 넣고 포위하였는데, 포위되어 지내는 겨울동안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이 얼마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은 로마 군단에도 퍼졌고, 270년에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전염병에 걸려 병사하였다. 그가 황제에 취임한지 겨우 2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얼마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지, 원로원은 그의 동생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뉴브 강 일대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단에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퀸틸루스의 황제 추대를 취소해 버렸다. 퀸틸루스를 지지했던 군단 병사들도 등을 돌렸고, 그는 사망하였는데, 사망 원인이나 내용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황제로 취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 제국을 침략한 이민족들을 격퇴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약탈하던 '반달족'을 격퇴하였고, 271년에는 그 틈을 타서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알레만니족'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더 이상 이탈리아 반도 내부도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르비우스 성벽'을 허문지 300년만에 다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쌓았다. 알레만니족을 섬멸한 아우렐리우스는 다시 '다키아' 속주를 침략한 고트족을 무찔렀으나, 로마 제국에는 산적해 있는 문제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기로 하였다. 다뉴브 강 일대를 정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제국 동부의 문제를 정리하기로 하였다. 270년 건국된 팔미라 제국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272년 로마로의 곡물 수출을 중단시키면서, 로마의 식량 안보를 위협하였다. 팔미라의 저항이 있었지만 아우렐리아누스에 대항하지 못하였다. 바발라투스와 제노비아는 로마에 포로로 잡혔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를 제압하면서 관대한 모습을 보여줬고, 이로 인해 많은 동방의 도시들이 로마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73년에 제노비아의 친척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다시 돌아온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를 약탈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팔미라는 쇠퇴하여 번영하던 도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도 다시 반란이 있었지만 금세 진압되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를 제압한 아우렐리아누스에게는 이제 서부의 갈리아 제국이 남아있었다. 274년 아우렐리아누스의 로마 군단과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테트리쿠스 1세)의 갈리아 군대가 대치하였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교섭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테트리쿠스는 교섭을 통해 신변을 보장받고 로마에 귀순하였는데, 갈리아 제국군은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결국 아우렐리우스는 격전 끝에 갈리아 제국군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의 행정 관료들이 그 자리에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으며, 적대하지 않는 도시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한 것 같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와 테트리쿠스를 앞세워 로마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진행했으며, 제노비아는 로마 근교의 별장에서 가족들과 살 수 있게 하였고, 귀순한 테트리쿠스와 그의 아들은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화폐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하는 등, 군인 황제 시대에 드물게 나타난 명군으로 평가 받고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이지만, 그의 통치도 5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275년 로마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아우렐리아누스는 페르시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방 원정을 떠났는데, 원정 도중 비서 였던 '에로스'와 근위대 장교들에 의해 암살 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우렐리아누스와 에로스 사이에 마찰이 있었고, 이에 에로스가 위조한 사형 집행서를 이용하여 근위대 장교들을 속여서 암살을 단행했다고 한다. 나중에 에로스가 문서를 위조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에 가담자들 중 일부는 자해하여 사망하였으며, 나머지도 모두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런 이유로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군부에서도 다음 황제로 스스로 나서는 이가 없었고, 원로원에서도 군부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저 하고 있었기 때문에, 2개월 가까이 비어있었지만, 군대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이 선출하는 방식으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가 다음 황제로 취임하였다.
게르만족에 대한 융화정책
황제가 된 타키투스에 대해서는, 그의 출신이나 경력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설이 있다. 먼저 그가 75세의 고령으로 군대에 분노를 살 것을 두려워한 원로원에 의해 내세워진 희생양이나 허수아비 황제라는 이야기가 있다. 혹은 실제 그는 나이가 더 젊으며, 군 출신으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측근인 지휘관들의 선배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서를 로마 도서관에 가져다 놓으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이유로, 역사가 타키투스와 혈연이 있을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떠나서, 그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기행적인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타키투스는공화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표명하고, 원로원의 권위와 특권을 회복시켰다. 또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국고로 환원시켰는데, 이런 행위들로 인해 사후에 명예롭고 고결한 황제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인 276년 '트라키아' 지방에서 난동을 피우던 게르만족 용병 집단을 진압한 후에, '카파도키아' 지역에 머물다가 열병으로 급사하였다. 혹은 암살당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후 타키투스의 동생이자 근위대장이었던 '마르쿠스 안니누스 플로리아누스' 병사들을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에 취임하였다. 플로리아누스는 고트족과의 전쟁을 이유로 로마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자신을 황제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고, 원로원도 이를 승인하면서 정식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동방 주둔 군단은 이러한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고, 아우렐리아누스의 측근이었던 동방 최고 사령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프로부스는 뛰어난 장군으로 군단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그 뿐만아니라 원로원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프로부스도 로마로 자신이 황제로 추대된 내용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는데, 원로원에서는 프로부스의 황제 취임도 승인한 것 같다. 어찌되었든 로마에 다시 두명의 황제가 생겼기 때문에, 플로리아누스는 동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진군하였다. 사실 프로부스의 동방 군단이 질적으로나 숫적으로나 열세 였는데, 대신 프로부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로 하고 플로리아누스를 자신의 근거지로 유인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수출을 차단하였다. 플로리아누스의 군단은 동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여 질병에 시달렸고, 프로부스가 플로리아누스를 지지하는 도시들을 파괴하며 압박하자, 승기를 잃었다고 생각한 부하들의 배신으로 플로리아누스는 살해되었다. 단독 황제가 된 프로부스는 기본적으로 타키투스가 내세운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시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는 277년부터 로마로 쳐들어온 이민족들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하였다. 프로부스는 갈리아 지역과 다뉴브 강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이민족들을 격퇴하였고, 로마에 친화적인 게르만족 일부를 로마 국경의 황무지에 정착하도록 지원하면서 융화정책을 펼쳤다. 280년에는 로마 내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하였고, 281년에는 로마의 적들에 대한 성공적인 토벌을 기념하여 개선식을 개최했다. 282년 프로부스도 페르시아를 정벌하려고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는데, 원정중 시행한 토목공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병사들은 근위대장이었던 '마르쿠스 누메리아누스 카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였다.
벼락맞은 황제와 군인 황제 시대의 끝
황제가 된 카루스는 황제 암살 사건과는 관계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사건에 연루된 병사들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에 자신이 황제가 된 사실에 대한 서신을 보냈으나,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속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우스 누메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정하고, 카리누스는 갈리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자신은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원정을 계속 진행하였다. 이 시기 페르시아는 '바흐람 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내분을 겪고 있어 국력이 피폐하여 로마 군단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283년 카루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은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함락시켰으나, 카루스는 갑자기 병에 걸려 막사에 누워있었는데, 심한 폭풍우가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고, 그 중에 하나가 황제의 천막에 떨어졌다고 한다. 카루스는 벼락을 맞고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나, 혹은 혼란스러운 틈에 암살되었다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는 정식으로 황제가 되어, 카리누스가 제국의 서부지역을, 누메리아누스가 동부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누메리아누스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전의를 상실하였고, 로마 군단은 원정을 그만두고 철수하기로 하였다. 284년 누메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중 친위대장이자 장인이었던 '아리우스 아페르'에게 암살되었다.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이었던 '디오클레스'가 근위대와 로마 군단에 의해 추대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하고 황제가 되었으며, 아리우스 아페르를 직접 처형하였다. 카리누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이민족을 격퇴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하는데, 별로 인기를 얻지는 못 했던 것 같다. 285년에는 '베로나'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비누스 율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카리누스에게 진압되었다. 카리누스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9명의 여성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던가, 수많은 유부녀들과 불륜을 저질렀다던가 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후에 상당히 왜곡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별로 인기가 없는 황제였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카리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에시아' 지방의 '마르구스 강' 유역에서 충돌하였는데, 전투 초반에는 카리누스가 우세하였지만, 도중에 카리누스가 부하에게 암살되었고, 그대로 전투가 종결되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독 황제로 로마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로서 3세기의 위기인 군인 황제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지만, 로마 제국은 '도미나투스'(전제정)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