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33대 황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 역사
- 2023. 3. 7.
명문가 출신의 황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는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으로 오랜 세월동안 원로원 의석을 세습해온 로마 귀족의 한명이다. 리키니우스 가문은 로마 공화정 후기의 '삼두정치'로 유명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배출한 가문으로, 로마의 오래되고 유력한 소수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데, 발레리아누스는 로마가 제정으로 변한 이후에, 특히 군인 황제 시절에는 드믄 로마 귀족 출신의 황제이다. 발레리아누스는 195년경 태어났는데, 그도 다른 군인 황제 시대에 역사의 전면에 나온 대부분의 인물들처럼 경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는 로마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로마 귀족 자제들이 받는 교육을 받고, 공직 경험을 차례차례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38년에는 '고르디아누스 1세'에 의해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는 '가이우스 비비우스 아피니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던거 같은데, 모이시아의 총독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반역하여 로마로 진군하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발레리아누스에게 '게르마니아' 전선의 군단을 규합해서 로마로 지원올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가 군단을 모아 로마로 출발했을때, 이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패해 사망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군단의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때가 253년으로 63세의 나이로 화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이밀리아누스 원로원에 의해 정식으로 황제로 선포되었으나, 발레리아누스는 개의치않고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로마로 진군하였다. 두 황제의 진형은 규모면에서 이미 큰 차이가 났기 때문에, 결국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아이밀리아누스는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싸움한번 겪지않고 로마로 입성한 발레리아누스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원로원에 의해 정식 황제로 승인되었고, 고령인 황제는 37세였던 자신의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를 공동황제로 선포하였다.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는 당시에는 상당히 새로운 방식으로 공동통치를 하였는데,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의 황제가 중점적으로 통치하는 협동 통치의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당시의 로마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내부에서는 자리를 지킬 실력만 있으면 사실상 누구나 황제를 자칭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외부적으로는 북쪽에서는 주로 '게르만족'이 끊임없이 침입해 왔으며, 동쪽에서는 '사산왕조'의 강성한 '페르시아'가 외교적인 괴롭힘 뿐만 아니라, 직접 로마의 영토를 침입하기도 하여, 양면으로 두드려맞고 있었다. 이에 발레리아누스 자신은 동방지역을 안정시키면서 페르시아를 상대하였고,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지역을 안정시키면서 로마의 북쪽 전선을 유지시켰다.
포로가 된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즉위 후 계속해서 집정관의 자리에 올라, 안으로는 자신과 아들의 권력을 공고히하여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노력을 하였고, 밖으로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의 침략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리아 속주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254년부터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크'에 도착하여 동방을 안정화시키고, 페르시아의 군대를 격퇴하기 위한 전투를 계속 하였다. 257년에 발레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를 페르시아로부터 탈환하여, 로마가 시리아 속주를 다시 되찾아오게 되었고, 원로원은 이를 칭송하여 '세계의 복구자'라는 칭호를 주었다고 한다. 260년에는 발레리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에 전염병이 퍼져서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샤푸르 1세가 군대를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 왔다. 당시 로마 군단의 규모는 7만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전염병으로 인해 제대로 전투를 치르지 못하고 포위되었다. 결국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는 샤푸르 1세에게 생포되어, 포로로 페르시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가 처음으로 적국의 포로가 된 사상초유의 사태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단순히 로마 군단이 전투에 져서 전장에 있던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과, 상황이 로마에 급박하게 돌아가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샤푸르 1세에게 평화협정을 요청하였는데, 샤푸르 1세가 협정에 응하는 척 하면서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가 생포하였다는 것이다. 또 군인 황제 시대에 다른 많은 황제들이 당했던 것처럼, 전세가 기울어 로마에 불리해지고, 제대로 된 보급도 받지 못하게 되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살해하려고 하자,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로 정치적 망명의 형태로 몸을 피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페르시아로 끌려간 발레리아누스는 다시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고, 적국의 땅에서 명을 달리하였다. 이로 인해 갈리에누스가 사실상 단독 황제가 되어, 로마의 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지만, 혼자 다 감당할 수 없었고, 제국의 영토는 3개로 나뉘게 되었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로 끌려간 이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내용은 없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샤푸르 1세의 전쟁 전리품으로 페르시아 영토 곳곳에 끌려다니면 갖은 수치와 모욕을 당하다 사망하였고, 사망 이후에도 황제의 가죽을 벗겨 짚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는 등의 내용은 있으나,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황제로서 오랫동안 로마와 분쟁관계에 있던 페르시아에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에 대해서 알고싶지도 않았을 것이고, 알기 쉽지도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내외적으로 계속되는 위협 때문에 포로가 된 황제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지 1년여 만에 사망하고 있기 때문에 포로 교환이나 해방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던것 같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해 로마에 있던 기독교도인들은 기뻐했다고 한다. 로마는 원래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혼란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거 로마의 다신교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거나, 다른 종교의 신을 데려와서 종교적 영향력을 이용하려고한 황제들이 있었는데, 유일신 신앙이었던 기독교도들은 이런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로마의 혼란한 상황을 원하는, 혹은 이용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이후 몇몇 황제들에 의해서 기독교 박해 정책들이 시행되기도 했는데, 발레리아누스도 기독교 박해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발레리아누스는 257년과 258년 소위 '쌍둥이 칙령'이라고 불리우는 칙령을 내려 기독교도를 박해했기 때문에, 발레리아누스에 대한 기독교도들에 의해 왜곡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