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명재상 능연각 24공신중 하나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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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

당나라 건국의 개국 공신

'이적'의 원래 이름은 '서세적'으로 원래부터 성이 '이'씨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중국 산동성인 '조주' '이호'의 부유한 집안 출인이었던 것 같은데, 수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17세의 나이로 반란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 '적양'을 따라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후에 '이밀'을 따랐다가, 이후 장안을 제압한 '이연'에게 귀순하였다고 한다. 이 이연이 바로 당나라를 세우는 고조가 되는데, 서세적은 공신으로 인정을 받아 '이' 성을 하사 받아 '이세적'이 되었다. 이세적인 된 서세적은 '동돌궐', '설연타',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후 당시 '진왕'이었던 '이세민'이 '태종'이 되면서 휘호를 피하기 위해, 이세적에서 다시 이적으로 개명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후에 고종이 되는 자신의 아이인 '이치'에게 이적이 충의로운 자이긴 하나, 은혜를 입은적 없는 자신의 아이에게 충성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그를 좌천시키면서 그가 고분고분하게 있다면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여 중히 쓰라고 하였다. 이세민은 이적을 첩주자사로하여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으나, 그는 명을 받자마자 집에도 들르지 않고 부임지로 향했다고 한다.

당 고종의 중신

당의 고종이 되는 이치는 즉위 후에 이세민이 말한 것처럼 이적을 불러 '상서좌복야'에 봉하였다고 한다. 이는 '사공'의 자리로 흔히 말하는 재상의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 할 수 있겠다. 고종은 어떤 일을 할때마다 이적에게 상담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정치적 능력도 뛰어났던 것 같다. 영휘 6년에 고종은 신하들에게 '소의 무씨'를 황후로 삼고자 한다고 물었는데, 많은 신하들은 이에 반대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적은 그러한 일은 집안의 일이기 때문에 따로 묻지 않아도 된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고종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현재의 아내를 폐하고 새로운 황후를 맞이하였다. 이 소의 무씨가 바로 그 유명한 '측천무후'가 된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사후에 본인이 권좌에 올라서 공포 정치를 행했는데, 이 때문에 중국의 유명한 악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녀는 실권을 잡은 후 고종의 중신들을 숙청했는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것이 이적으로, 앞서한 그의 말이 그 이유라고도 알려져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비난은 주로 궁궐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것으로, 민생을 보살피고 나라를 훌륭히 다스렸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불러오게된 이적도 그에 대한 책임에 대해 안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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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멸망시킨 자

수나라의 멸망에 영향을 끼친 원인 중에는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 것도 있다. 수나라의 후계 왕조로 평가되는 당나라도 644년부터 두차례에 걸쳐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였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당 태종때 첫번째 원정을 감행하였고, 고종이 시행한 두번째 원정도 실패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당 태종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공략이 얼마나 어려운지 감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 중국의 수도는 베이징이지만, 당시는 장안이 수도 였던 만큼, 고구려는 상당히 먼 곳에 있으며 , 그 때문에 당나라의 대군에 대한 보급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수나라 시대부터 생각하면 벌써 3번째의 원정 실패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적은 고구려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고구려 내부가 평안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되어 진다. 666년에 고구려의 왕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으며, 두 동생인 '연남건'과 '연남산'이 국정을 도왔다. 그러나 형제의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하는 자들이 있었고, 결국 형제간에 내분이 생겨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적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 고구려를 공격해서 그대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된다. 이렇게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적은 이듬해인 669년 76세로 천수를 다하면서, 신라와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하게 된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 상당히 유능했던 것으로 보이고, 본인의 살아있는 동안에는 평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리고 고종이 서거하면서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시키고 예종을 즉위시키는 등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스스로 칭제하며 나서자, 이적의 손자였던 이경업이 양주에서 거병하면서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반란이 실패하면서 일족이 주살되었고, 이적 또한 사후에 부관참시 당했다고 한다. 살아서는 당 태종의 '능연각 24 공신' 중 한명으로 추대되었지만, 죽어서는 시체마져 온전히 보존 받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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