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 첫번째 종신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역사
- 2023. 2. 3.
몰락한 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코르넬리우스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술라는 코르넬리우스 중에서도 주류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고, 그의 선조때부터 이미 정치권에서 배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몰락 귀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는 젊은 시절 로마의 하층민들과 함께 공동주택에서 지냈으며, 가지고 있던 재산은 로마의 해방노예들과도 별반 다를게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귀족출신으로 평민과는 달랐는데,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다는 것을 보면 귀족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어찌되었든 코르넬리우스의 일원으로, 그 이름과 연줄이 그의 정치 생활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술라는 기원전 107년 재무관에 당선되어 당시 집정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에서 '유구르타 전쟁'에 참전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유구르타 전쟁에서 누미디아는 사실상 로마에게 제압당했으나,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는 인접국의 왕이자, 그의 장인이기도 했던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보쿠스 1세를 등에 엎고, 마우레타니아의 군대를 통해 전쟁을 계속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태의 전쟁을 끝내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 바로 술라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보쿠스 1세와 협상을 원했고, 사절로서 부관인 술라를 파견하였다. 술라는 유구르타의 방해를 피해 보쿠스 1세와 그의 신하들을 설득하였고, 로마의 동맹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유구르타는 생포되어 로마에 넘겨지게 된다. 이러한 전공이 누구의 것인가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는 이 문제로 인해 사이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구르타 전쟁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전 상관이자, 서로 사이가 나빴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유구르타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술라의 공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술라도 자신이 정치적 입지를 상승시키기 위해 이러한 분위기를 거부하지 않은 것 같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로마 공화정의 정치권에서는 신분에 따른 차별과 빈부의 격차 등의 이유로 귀족들과 평민들 간에 갈등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알력다툼이 상당히 심화되었는데, 서로의 신분이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포풀라레스'(평민파)와 '옵티마테스'(원로원파)로 나뉘어서 파벌 싸움을 했다. 이 시기에는 게르만족의 일부 부족이 정착지를 요구하며 갈리아 지방을 황폐화 시키며 돌아다녔는데, 그들은 장래에 로마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로마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파견한 집정관과 로마 군단은 모두 게르만족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군사적으로 유능한 지도자가 로마를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이에 평민파에서는 평민 출신이자 유구르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기도 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지지하였고, 게르만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으로 그를 집정관에 계속하여 당선시켰다. 기원전 104년 우려했던 대로 게르만족은 로마를 침략하였으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맞섰다. 당시 게르만족은 거의 30만에 육박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1/3도 안되는 병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게르만족을 섬멸시켰고, 로마에서는 그의 인기를 따를자가 없었으며, 그는 6번이나 집정관에 취임했으며, 그중 5번을 연속으로 연임했다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한편 술라는 기원전 97년에 법무관으로 당선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파르티아와의 외교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등 차근차근 정치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귀족들을 중심으로한 원로원파에서는 이러한 파격적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록 그의 휘하에 있었던 사람이긴 하나 군사적 재능이 출중하고, 귀족출신이기도 한 술라를 자신들의 파벌에 가담시켰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한 술라는 남부전선에서 활약하였고, 그 공으로 '풀잎관'이라고 하는 로마 군단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되는 훈장을 받았다. 이는 북부전선에서 활약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비견할만 했고, 이로서 원로원파의 최일선에서 평민파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대항마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의 적
기원전 88년 술라는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또한 동시에 네번째 아내인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 하면서, 당시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는 등 전성기에 다달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 내부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외부에 있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술라는 집정관으로서 로마 군단을 소집하여 해외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이미 고령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가 일으킨 사건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히 잃은 상태였다. 이때 호민관이었던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접근하여 그의 힘으로 자신의 법안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줘서 정치적 영향력을 찾을 요량으로 미트라다테스 6세에 대한 원정의 지휘권을 받기로 협의하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의 옛부하들을 로마로 불러들여서 술피키우스의 법안을 지지하게 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로마가 혼란스러워지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파 정치인들은 몸을 숨겼으며, 술라도 한때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집으로 피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술라는 불온한 움직임에 로마를 탈출하여 군단을 소집하였던 놀라를 향하였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원정의 지휘권을 넘겨받게 된다. 사실 이러한 폭거를 통해서 주류 정치권에 다시 진입한다고 해서 고령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 시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상당히 회의적인데, 막 주류 정치권에 진입해서 한참 날개짓을 하던 술라에게는 상당한 위협을 다가왔던 것 같다. 술라는 편성된 군단을 이끌고 즉시 로마로 북진했다. 로마의 집정관이 로마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광경일 것이다. 로마 건국후 70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처음보는 광경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키피우스는 제대로 된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로마에서 도망쳤다. 술라는 로마를 접수하자 원로원에 출석하여, 자신의 행동이 로마의 전통과 권위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음을 설파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키피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게 하였다. 이후 그들에 가담했던 자들을 숙청하였으며, 술키피우스는 도주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북아프리카까지 달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폭거에 항의하기도 전에, 맞닥뜨린 유례가 없는 술라의 폭거에 상당히 분노하였는데, 이듬해인 기원전 87년에 치루어진 집정관 선거에서는 술라와 가까운 후보는 한명도 당선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술라는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위해 군사적 성과를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중단되었던 미트라다테스 6세에 대한 원정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로마를 떠나 있는 사이에, 다시 평민파에 의해서 로마가 장악되는 것을 걱정하였고, 집정관으로 당선된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에게 자신이 제출한 법안에 대해서 철회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맹세를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비슷한 생각과 행동들을 보면, 로마의 적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
미트라다테스 전쟁
술라가 이탈라이 반도를 떠나자, 평민파였던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술라와의 맹세는 강압적인 것으로 무효라고 선언했고, 술라가 폐지시킨 술피키우스의 법안을 다시 발의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에서는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내세워 거부권을 행사하며 맞섰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주변 도시들을 돌면서 지지를 호소하였고, 이를 본 원로원파들은 술라처럼 병사를 모아서 로마로 돌아올 것을 우려하여, 그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해버렸다. 졸지에 반역자로 몰린 코르넬리우스 킨나에게 남은 길은 없었고, 아프리카에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연합하여 많은 지지자들을 모아 로마로 돌아갔다. 이미 상당한 풍파를 겪은 로마에서 평민파와 원로원파 사이에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한 신뢰는 없었다. 그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는데, 먼저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처형하였으며, 50여명에 달하는 원로원 의원과 1000여명에 달하는 유력자들이 숙청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선거와 절차를 무시하고 두 사람은 집정관 자리에 취임하였다.가이우스 마리우스는 7번째 집정관 취임이었는데, 그는 취임한지 몇일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술라는 그리스의 아테네로 향하면서 이러한 소식들을 전해 들은 것 같지만, 이미 원정에 나온 그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대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술라는 미트라다테스 6세와 동맹한 아테네를 포위하여 항복시켰으며,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들이 로마에 협조하겠다고 사절을 보내왔다고 한다. 기원전 86년에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술라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은 그리스와 폰토스의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로마 군단과 폰토스 연합군은 숫자에서 3~4배, 혹은 10배 이상 차이 났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장악한 로마에서는 따로 미트라다테스 6세를 상대할 군단을 편성하여 파견하였는데,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이끄는 이 군단은 술라의 군단과도 조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와의 싸움을 피하고 미트라다테스 6세를 쓰러트리는데 집중하였다. 이때 플라쿠스가 이끄는 군단에서 많은 병사들이 이탈하여 술라의 군단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당시 로마 군단은 이미 모병제로 바뀌어 있어 전쟁 과정에서 약탈을 통해서 한 밑천 잡을 생각을 가진 병사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약탈에 대한 문제로 인하여 군단의 지휘관이었던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후에 부관인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병사들에게 살해 당하였으며, 종국에는 군단 자체가 술라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어서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도 폰토스 연합군을 패퇴시킨 술라는 그리스의 섬들을 점령하면서, 미트라다테스 6세를 폰토스 쪽으로 몰아냈다. 핌브리아의 군단도 미트라다테스 6세를 몰아부쳤는데, 로마 군단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도망가는 미트라다테스 6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술라는 폰토스의 해군과 배상금을 받는 대가로, 포로들을 석방하기로 미트라다테스 6세와 몰래 협약을 맺었다. 술라는 이때 원정을 중지하고 로마로 회군할 것을 생각한 것 같은데, 그를 위한 해군과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술라는 핌브리아의 군단까지 흡수하여 자신의 휘하에 넣고, 군단의 사기를 올리고 충성심을 얻기위해, 군단이 마음대로 소아시아지역에서 약탈 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편 로마의 집정관인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술라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군단을 소집해서 일리리아를 향해 행군하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는 술라에 비해 떨어지는 군사적 역량을 부하들에게 의심당하였으며, 로마 군단끼리의 싸움에서 얻을게 없다고 여긴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낮았던 것 같다.
종신 독재관
술라가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원로원파가 규합하기 시작했다. 정권을 잡고 있던 평민파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군단을 편성하여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평민파와 원로원파 사이에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등이 술라를 지지하였고, 반대편에서는 집정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그리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인 '가이우스 마리우스'(小 마리우스)가 술라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연이은 전투에서 민중파는 술라가 이끄는 군단에게 패배하였으며, 동시에 술라는 끊임없이 평민파 군단의 병사들을 이반시켰다. 결국 로마의 '콜리네 성문' 앞에서 술라가 이끄는 군단이 승리하면서 내전은 원로원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기원전 81년 술라는 로마의 비상사태를 수습하고 공화국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원로원 이용하여 독재관에 취임하였다. 원래 독재관은 그 막강한 권한을 제한하기 위하여 임기가 6개월에 불과하였는데, 술라는 임기가 없는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렇게 독재자로 정권을 잡은 술라는 1만명에 달하는 노예들을 해방시켜주면서, 자신의 가문인 코르넬리우스의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렇게 그들의 충성을 산 술라는 그들을 자신의 사적인 무력집단으로 활용하며, 대대적인 평민파의 숙청을 시작하였다. 그는 패잔병들을 학살하였으며, 반대파 인물들을 체계적으로 숙청하기 위해 살생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살생부에는 4700여명의 이름이 올라있었는데, 그 중에는 당시 18세의 젊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도 있었으나, 그는 학살을 피해 로마에서 도망쳤다. 사망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무덤이 파괴되었고, 사실상의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처치를 당하였다. 이렇게 숙청당한 반대파의 재산은 몰수되어 처분되었는데,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때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술라의 개혁과 은퇴
술라는 민중파가 한 개혁들을 뒤집고 철저히 귀족과 원로원을 위한 개혁을 진행하였다. 먼저 원로원 인원을 600명으로 늘리고 권한을 강화하였는데, 호르텐시우스법을 폐지하여 법안을 만들때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도록 다시 바꾸어 놓았고, 로마의 배심원을 다시 원로원 의원들이 차지하게 하여, 원로원이 사법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게 하였다. 또 로마의 영향권에 있는 각지에 신도시를 세워 군복무를 마친 퇴역 병사들을 이주하게 하였는데, 이로서 퇴역병사들이 받아야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일때 미리 알아차리기 쉽게 되었다. 계속해서 곡물법을 폐지하여 곡물가격이 올라서 일반 평민들은 부담이 가중되었지만, 부유한 기득권층을 자신들의 부를 더 공공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군단의 지휘권은 원로원이 결정하도록 하였으며, 집정관이 지휘할 수 있는 군단의 수를 제한하고, 한명의 집정관이 군단을 지휘할때 나머지 한명은 로마를 운영하도록 하였고, 로마의 직할지 내에서는 로마 군단을 데리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속주 총독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원로원에게 통제권을 주는 등, 쉽게 말해 자신처럼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와 군사 쿠데타를 잃으키는 것을 원천 봉쇄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나오지 못하도록 집정관의 연임을 막고, 재취임하기 위한 기한을 10년으로 하였고, 호민관들이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하였다. 기원전 80년 술라는 종심독재관임에도 불구하고 2년만에 물러났는데, 2년간의 성과로 충분히 만족한 것 같다. 이미 그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국내에 없었으며, 그 대부분은 이미 처형당했기 때문에, 술라는 은퇴한 후에 자신의 별장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그후 그는 기원전 78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묘비에는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고 쓰였다고 한다. 술라는 원로원파, 즉 보수기득권으로 로마 공화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개혁을 하였다고 평가하는데, 실상은 기득권층의 기반은 공고히하고 평민과 가난한자들로 대변되는 개혁파를 철저히 억압함으로 인해, 그 붕괴를 앞당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평민파가 정권을 계속 잡고 있었을 경우 로마 공화정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기는 하나, 술라의 개혁은 사회적 불만을 하나도 해결하지 않았고 오히려 키웠기 떄문에 계속 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마 공화정은 다른 방향에서 무너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