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 역사
- 2023. 1. 27.
멈출줄을 모르고 계속 확장하는 로마의 영향력
로마가 건국되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그 영향력을 꾸준히 확장하여 주변세력과 갈등을 겪으며,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세력권 안에 넣는데 500년의 세월이 걸렸다. 로마는 그동안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고, 로마의 경제와 로마 군단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인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자영농민들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외부로 세력권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넓은 평원에서 대량의 곡물이 로마로 들어왔고, 넓어진 영향력을 유지시키며 동시에 더 넓은 세력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본업인 농업에서도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계속되는 전쟁에 동원되면서, 그 본업조차 제대로 영위해 나가지 못하였다. 남자들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사비로 장비를 구해서 참전하러 떠나야 했고, 여자들은 남아서 가정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돈을 빌리고 농장을 팔았다. 그 후 먹고 살기위해 일거리를 찾아 로마로 상경하여 많은 무산자 계급들과 함께 로마 시내를 배회하였다. 이시기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이전처럼 로마의 동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여, 그 영토를 매각하거나 임대하였는데, 이 또한 자금 동원력이 있는 부유층들이 독점하였다. 로마의 국유지는 원래 무산자들에게 싼값에 소작을 주었는데, 부유층들은 이 땅 또한 자신들이 독점하기 위하여 불법적으로 점유하였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을 중심으로한 부유층들은 이런식으로 로마의 농지들을 독점하여 '라티푼디움'이라는 거대한 장원을 형성했으며, 지중해를 통해 공급되는 많은 노예들을 통해서 운영하였다. 로마에서는 투표를 통해 공직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부유층들은 이러한 구조를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이용하여 정치적 집단을 만들고, 그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귀족과도 다르고 평민과도 달라진 이러한 자들을 '노빌레스'라고 불렀다.
그라쿠스 형제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大그라쿠스)인데, 평민계급에 속하는 출신으로 '셈프로니우스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대에 처음으로 집정관을 지냈으며, 앞서 언급한 노빌레스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머니는 당시 로마 최고의 영웅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이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정치가가 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고발당한 재판에서 그를 구한 인물로,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코르넬리아는고대 로마의 완벽한 표상으로 여겨지며,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라는 말에 어울리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저명한 원로원 의원일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유명인사 였기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는 당대에서도 가히 최고의 환경에 태어나 자랐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 중 형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小그라쿠스)는 기원전 163년에, 동생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54년에 태어났다. 모두 12명의 형제가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것은 누나 '셈프로니아'와 두 형제 뿐이었다고 한다. 셈프로니아는 스키피오 가문의 당주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와 결혼하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이러한 막강한 배경이 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하여 '카르타고'를 공격할 때도 참여하였으며, 기원전 137년에는 '누만티아'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누만티아에서는 결과적으로 원정은 실패하였지만, 포로가 되었던 2만명의 로마군을 협상을 통해 귀환시켰기 때문에, 당시 원정책임자이자 집정관인 '가이우스 호스틸루스 만키누스'는 원정 실패의 책임을 지고 추방되었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및 다른 장교들은 민회에서 옹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력도 있어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원로원 의원으로서 승승장구 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참전 경험에서 군단의 주축을 이루는 병사들의 처지나 생계에 대한 부분을 알게되어 계혁을 진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라티푼디움이 조성되면서 중소 자영농민들이 파산하고, 그로 인해 재산계급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로마의 징병자원이 부실해 지는 것과 원로원이 지나치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문제시 하였다. 로마 군단은 로마 시민이 직접 참가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소유한 재산에 따라 그 역할이 달랐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직접지킨다는 의미에서, 다른 군대들보다 상대적으로 사기가 높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집과 재산을 모두 잃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병역을 이행가능한 사람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의욕면에서도 상당히 저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번에 처음 제기된 문제도 아니었는데,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에서 지정한 토지상한제 등은 이미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집단에 속하는 로마 시민의 명의를 이용하여 차명으로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광대한 영토는 소유 노예들이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134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된 후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라고 불리우는 농지 개혁 법안을 제출하였다. 주된 내용은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에 기반하여 개인과 가문이 임차할 수 있는 국유지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국유지의 임차권을 개인이 양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부유층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현재 가지고 있는 규정 이상의 토지를 반환하는 것에 대하여 국고에서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반환된 토지는 농민들에게 재분배하고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여 자영농민 육성을 장려하였다. 개혁의 내용은 단순히 부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닌, 과거 한번 집행되었던 법을 되살리고 공평한 분배를 주장하는 것이었기에, 원로원 의원들은 정치력의 약화를 우려해 들어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다른 호민관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이용하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법안에 계속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맞섰다. 이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반대로 로마 시내에서 열리는 모든 축제와 시장이 열리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강행하였다. 이러한 강경대치 속에서 결국 옥타비우스를 해임하고 법안을 통과 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번에는 원로원이 직접 나서서 해당 법안을 위한 예산을 일부로 적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마침 이시기에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3세'가 사망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게 물려준다고 유언을 남기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이 유산을 이용하여 법안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려고 하자 원로원은 실력행사에 나서게 된다.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선동하였고, 당시 최고 제사장이자 그의 사촌이기도 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를 주동자로하여 아예 무기를 들고 때로 몰려가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과 싸움을 벌였고, 그들을 살해하여 티베르 강에 버렸다. '신체불가침권'을 보장받는 호민관이 임기중에 살해당한 사상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스키피오 나시카를 추방하는 것으로 일을 무마하였으며, 농지법의 시행을 약속하긴 하였으나, 그 시행권한을 원로원이 갖고서는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배우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리하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10년이 흐른뒤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당선되게 된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보다 9살이 어렸는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30세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때 이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21세였다. 그도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처럼 몇번의 군복무 외에는 평범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형의 호민관 활동과 개혁 입법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23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여러가지 개혁 입법을 추진하게 된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먼저 형이 실패했던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에 기반을 둔 농지개혁법부터, 곡물가격 안정 및 빈민구제를 위한 곡물법, 17세 미만의 시민의 징병을 금지하고, 공공사업을 장려하였기 위한 법을 입법 하였다. 또한 원로원이 고발을 통해 '사법살인'하는 것을 막기위해 배심원을 '에퀴테스' 계급이 독점하게 하고, 새로 생기는 식민지에 도시를 세우고 시민들을 이주시켜 경제를 부흥시키고,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여 축소된 로마의 잠재력의 확대를 추구하였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의 형과 같이 로마 민중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지만 원로원을 비롯한 기득권층에게는 절실히 미움받았는데, 결국 그도 형처럼 무력을 통해 제거되었다.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 선거에서 떨어졌다. 이때 집정관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매우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법안을 철회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지지자들과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충돌과정에서 오피미우스의 부하 한명이 살해당하자, 원로원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다. 오피미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가 그들을 체포하였으며,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도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체포된 3000명의 지지자는 모두 처형되었다.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머리를 잘라 '포로 포마노'에 효수하였으며, 그 몸은 형과 같이 티베르 강에 버렸다.
실패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그라쿠스 형제가 시행한 개혁들은 실패하면서 원로원에 의해 모두 폐지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이후 로마에서 대부분이 다시 시행되었다. 그렇다면 로마에 필요했던 개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실패하게 된 것일까. 개혁의 시기가 너무 빨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급진적인 개혁의 내용 때문에 원로원의 보수 세력의 반발이 너무 심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당시에 그라쿠스 형제가 받은 지지를 생각하면, 이미 당시에도 민중들에게 개혁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바로 무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당시에 '호민관 특권' 이라는 것은 이미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에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아우구스투스' 또한 호민관 특권과 군단의 지휘권을 이용하여 황제의 지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후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들 다시 시행시키는 인물들 또한, 정치적 권한 뿐만 아니라 군단이라는 군사력을 뒷배로 두고 있었다. 만약 아우구스투스에게 군단의 지휘권이 없었다면, 그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처럼 호민관의 특권따위 무시되고 살해 당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까지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개혁을 위하여 시민들이 봉기하거나, 폭력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숫하게 볼 수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군권을 등에 엎은 독재자나 쿠데타 세력들이 시행한 일부 개혁들이 칭찬받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인 고대시대부터 지금까지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본질은 어느시대나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기득권층의 무리한 개혁 진압으로 인해 원로원은 점점 평민들의 지지를 잃어갔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점점커져 결과적으로 내란을 거쳐 로마 제국이 성립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