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5대 황제이자 유명한 폭군 「네로」
- 역사
- 2023. 1. 24.
찬탈자
'네로' 황제의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로 그의 어머니인 '율리아 아그리피나'(小아그리피나)가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고 있었지만, 혈통만으로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로마에서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잦은 폭력행위와 범죄로 구설수에 올랐고 재판을 받아 사형 판결까지 받았던 인물로, 후에 사면되었지만 그가 태어난지 2년만에 사망하였다. 그런 네로의 운명은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로마 제국의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면서 완전히 바뀌게 된다. 클라우디우스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그로 인해 어렸을때부터 차별을 많이 당해왔는데, 그로 인한 심약한 성격과 반복된 안 좋은 결혼 생활 때문인지 배우자의 행동에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때부터 자신의 혈통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그리피나는 황궁에 들어가자 자신의 아들 네로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공작을 시작하였다. 먼저 로마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뛰어난 철학자로 꼽히는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를 네로의 가정교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미움을 사 '코르시카'로 추방되어있었는데, 황비 신분이던 아그리피나가 다시 로마로 불러들인 것이다. 또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들이자 사실상 후계자였던 '브리타니쿠스'를 견제하기 위해 세네카의 친구였던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단독으로 근위대장에 임명하여 황궁내 군권도 장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황제 취임에 대한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인 '옥타비아'의 약혼을 파기시키고는 네로와 결혼시켰다. 그리고 네로를 그대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시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개명시킨다. 5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버섯요리 중독으로 사망하면서 네로가 차기 황제로 취임하게되었는데, 건강하던 황제의 사망 소식에 아그리피나가 독버섯을 이용하여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과 네로 황제의 취임은 거의 동시기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가 사망전에 작성해 놓은 유언장에는 자신의 아들인 브리타니쿠스와 네로를 공동통치자로 지명해 놓았던 것 같지만, 세네카가 원로원을 설득하고 부루스가 근위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은 무시되고 당시 17세의 나이에 불과했던 네로가 단독 황제로 취임하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50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 시민들도 젊은 황제를 요구하고 있어서, 새 황제의 취임이 일반 대중에게는 큰 반발은 없었던 것 같다.
아그리피나의 섭정
젊고 잘생긴 금발의 황제는 원로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황제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집행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며 취임했지만, 결론적으로 이 약속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황제에 취임하자, 그가 어린 것을 핑계로 직접 정치를 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뿐만 아니라 세네카나 부루스에게도 어린 황제는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휘두르기 위한 좋은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집권하자 마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혈족 중 일부와 측근들 중에 방해가 될만한 인물들을 즉시 숙청하였다. 네로는 젊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실무 경험도 없었는데, 이는 섭정시기 뿐만 아니라 이후 친정을 시작하고 나서도 큰 걸림돌이 된다. 그래도 측위 초 5년간은 섭정의 정치경험도 있어서 인가 로마는 축제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네로가 성장함에 따라 완전히 바뀌게 된다. 네로가 성년식을 마치고도 아그리피나는 네로에게 황제의 권한을 넘겨주지 않아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네로는 자신의 아내였던 옥타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정략결혼으로 강제로 결혼한데다가 다른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서 아그리피나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아그리피나는 옥타비아와 네로가 이혼하면 황제의 정통성에 금이 갈 것을 걱정한 것 같다. 그녀는 옥타비아와 브리타니쿠스를 거론하며 광장에서 네로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이것이 단순히 네로를 겁주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권력을 이용해 아들까지 버릴려고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네로는 이 사실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네로는 사람을 시켜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될 수 있는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하고,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마저 병사를 보내 살해하였다. 이런한 일련의 행위들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은 없었으나, 로마 시민들은 상당히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아내 옥타비아도 고발하여 로마에서 추방하였고, 역시 사람을 보내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네로가 몰락하기 전까지 계속되어서, 네로는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는 친척들을 차례 차례 살해하였다. 이것은 네로가 폭군으로 불리게 되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세네카의 퇴장과 멈출 수 없는 폭주
네로의 측근이자 세네카는 야심이 큰만큼 눈치도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네로에 의해 아그리피나가 숙청되고, 친구인 부루스도 62년에 병사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탱해줄 사람이 없어진 세네카는 고령을 이유로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세네카는 3대 황제인 '칼리굴라'때 암살음모 혐의로 사형을 판결 받았으며,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때도 역시 재판을 통해 추방되었을 정도로, 그 능력만큼이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둘 정적을 제거하면서 폭주하기 시작하는 네로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생각외로 네로는 세네카를 환대하면서, 그의 은퇴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제 완전히 브레이크가 망가진 네로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공직에 앉히고, 마음가는데로 기행을 일삼게 된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여 수염을 기르고, 자신이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며 음유시인 흉내를 내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로마를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외국의 문화를 상대적으로 배척하였는데, 로마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로마보다 오래전부터 찬란한 문명을 키웠던 그리스에 대한 시기심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로마에서 그리스에서 시행되던 '올림픽'을 가져와 '로마 올림픽'을 개최하거나, 그리스의 체육관 '김나시온'을 건설하고 운동을 장려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올림픽에 출전하여 모든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황제를 상대로 경기에서 이겼다가는 사형 판결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다른 선수들은 본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심지어 전차경주에서는 경기도중에 황제가 자신이 운전하던 전차에서 굴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진이 그대로 달렸으면 네로가 이겼을꺼라고 우승 판결을 내리는 촌극까지 빚어졌다. 또한 그리스 지역을 순회하며 시낭송 대회에 참가하거나, 그리스 관광을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네로의 통치에도 로마는 생각보다 잘 운영되었던 것 같은데, 서쪽에서는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와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동쪽에서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파르티아'와 중재를 성공적으로 진행시킴으로 로마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네로는 집권기 동안 로마의 예술 발전에는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로마 대화재
네로는 유흥과 사치에 많은 돈을 낭비하였으며, 몸도 점점 비대해져 갔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고발하여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착복하여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여 사치를 이어나갔다. 네로에 대한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온 것은 의외로 다른 곳이었는데, 64년 로마에서 발생한 대화재가 시발점이 되었다. 이 화재는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규모였는데, 무려 5일에 걸쳐서 불타올랐으며 로마 전체의 2/3 정도가 불탔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로 많은 집들이 무질서하게 다닥다닥 붙어있었으며, 그러고도 모잘라서 다른 집의 천장을 바닥삼아 2층, 3층을 증축하여 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화재는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을 것인데, 이러한 흉흉한 민심은 네로를 타겟으로 분출하게 된다. 불타버린 로마에서는 네로가 일부로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아무리 네로라고 하여도 그런 행위를 했다만 황제 실각은 커녕 성난 군중에게 즉시 살해당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 였기 때문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을 일파만파 퍼져서 네로가 높은 누각에 앉아 불타는 로마를 내려다보며 노래를 불렀다던가, 네로가 노예들을 시켜 로마 곳곳에 불을 지르고 다니게 했다는 등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일의 심각성을 느낀 네로는, 그 다운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하였다. 네로는 당시 로마에서는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도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당시 다신교에 타국의 문화를 존중하던 로마에서 유일신을 믿으며 로마의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던 기독교도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네로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기독교도를을 붙잡아 잔인하게 처형했다고 한다. 이때 예수의 첫번째 제자인 베드로도 순교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황제가 기독교도들에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민심이 흉흉했음에도 네로는 자신에 대한 의심이 걷혔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화제로 불탄 자리에 자신을 위한 궁전인 '도무스 아우렐리아' 건설을 시행하고, 고갈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화폐를 개혁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결과적으로 로마의 물가 상승을 일으켜 평민들의 불만은 가중되었다.
피소의 음모와 베네벤툼의 음모
65년에 일어난 피소의 음모라고 불리우는 이 황제 암살모의 사건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바로 로마의 명사들 중 한명이었던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의 해방노예가 네로에게 계획을 밀고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네로는 즉시 스카이비누스를 잡아들여 그를 고문하기 시작하였으며, 잔혹한 고문이 계속되는 동안 이름이 불리는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고문했다. 이러한 내용은 실제 음모가 있었는지 그 뿌리부터 의심하게 만드는데, 뿐만 아니라 네로는 자신의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나,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 같은 인물들도 끼워넣어 처벌했다. 로마의 많은 뛰어난 명사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었고, 네로의 잔악한 행태는 로마 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음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시작으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도 이때 처형되었으며, 그나마 알려진 유명인 희생자만 40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 67년에는 군인들이 연루된 '베네벤툼의 음모'가 있었는데, 이 또한 피소의 음모처럼 그 실체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네로는 의심스러운 군단 사령관들을 숙청하였고,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이자 군단에서 인기가 높은 코르불로 같은 인물도 별다른 조사 없이 처형되면서, 군단 내부에서도 네로에 대한 불만이 치솟게 된다.
네로의 죽음
결국 '갈리아'(현제의 프랑스) 지역의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그리스지역에 있던 네로는 깜짝놀라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원로원과 시민들, 그리고 근위대가 자신을 지켜주리라고 생각한 것 같았지만, 그동안의 폭정으로 이미 네로의 편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율리우스 빈덱스는 반란은 일으켰으나 직접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으면서, 연설을 통해 네로를 정치적으로 공격했고, 결국 '히스파니아'(현제의 스페인)의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루시타니아'(현제의 포르투갈)의 총독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가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네로는 '게르마니아'(현제의 독일) 사령관인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하였고, 율리우스 빈덱스가 패배하고 자결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한 로마 군단은 네로를 따를 것을 거부한다. 이에 갈바는 로마 군단에게 막대한 보수를 제시하며 회유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원로원은 네로를 '로마의 적'으로 공표하고 갈바를 새로운 황제로 공표해 버렸다. 네로의 근위대장 중 한명인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도 갈바에게 돌아서 버렸고, 나머지 한명의 근위대장은 도망쳐버리면서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는 민중들에게 호소하려고 하였지만, 그마저 맞아죽지 않을까 겁내며 자신의 노예의 집으로 숨어버렸다. 결국 네로는 공포에 떨다가 자해하여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네로는 불과 31세 였다.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 그를 도와줄 수 있었던 자들은, 그가 이미 다 처형한 후였다.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제 힘인양 휘두르던 네로는, 결국 자신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파멸하였다. 네로의 죽음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