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에 대항한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
- 역사
- 2023. 1. 29.
야심만만한 누미디아의 공동 통치자
기원전 148년,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와 동맹하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싸웠던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의 지역에 있는 '카르타고'의 인접국으로, 카르타고가 완전히 몰락한 이후에 로마의 동맹으로서 일대를 제패하고 있었다. 마시니사는 당시가 고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오래 살았는데,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아내들과의 사이에서 86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마시니사는 사후에 아들 중에 '미킵사'와 '마나스타발', '굴룻사'의 3명에게 나라를 나누어주어 통치를 맏겼다. 그러나 마나스타발과 굴룻사는 병으로 일찍 죽어 미킵사가 단독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유구르타'는 마나스타발의 자식으로 왕권에서는 멀어졌으나, 어렸을때부터 총명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왕인 미킵사에게는 '아드헤르발'과 '히엠프살'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대해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하여, 로마가 '누만티아 전쟁'의 지원을 요청하자 유구르타를 파견했다고 한다. 누만티아 전쟁에서 로마 군단을 지휘한 것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에 해당하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우스'였는데, 유구르타는 그의 밑에서 종군하면서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나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우스가 미킵사에게 유구르타를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에 미킵사는 마음을 바꾸어 유구르타를 양자로 들였고, 기원전 118년 사망하면서 아들들인 아드헤르발과 히엠프살, 유구르타가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하였다. 유구르타는 금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는데, 미킵사가 사망하기 전에 병을 앓았기 때문에, 유구르타는 다른 형제들에게 사망 전 5년 간의 왕명을 철회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히엠프살은 그 내막을 알아체고는 유구르타가 양자가 된게 3년 전이니까 그 명령부터 해소하자고 면박을 주었다. 다음해인 기원전 117년 유구르타는 히엠프살을 유인하여 암살하였다. 아드헤르발은 병사를 모아 유구르타와 싸웠으나, 대패하였고 로마로 도망가서 유구르타의 만행을 처벌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당시 로마는 이미 전 지중해에서 학고한 패권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구르타도 즉시 부하를 로마로 파견하여 유력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정치공작을 시작하였다. 로마는 사회는 이미 상당히 부패에 있어 원로원 의원을 필두로하는 기득권층은 '라티푼디움'을 운영하여 재산을 쌓고, 쌓인 재산을 이용하여 정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에 관심이 있었다. 게다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하고 '스키피오 가문'도 몰락하여, 누미디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 적었을 수도 있다. 매수당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 사건은 흐지부지 되어, 로마에 의해 누미디아 왕국을 동서로 나누어 유구르타와 아드헤르발이 각각 다스리게 중재하였다. 유구르타는 5년간은 얌전히 있었지만, 기원전 113년 아드헤르발을 다시 공격하여 왕국 전체를 손에 넣기로 하였다. 아드헤르발은 패배하여 수도 였던 '키르타'로 피신하여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였다. 아드헤르발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로마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중재는 커녕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 결국 1년에 걸친 농성에 지친 키르타의 이탈리아와 로마의 상인들이 아드헤르발에게 항복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유구르타는 목숨은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드렸지만, 아드헤르발이 성문을 나오자, 그를 포함하여 성 안의 이탈리아와 로마의 상인들까지 모조리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구르타와 로마는 본격적으로 적대시 하게 된다.
부패한 로마와 유구르타 전쟁
로마 시민들은 유구르타가 로마 사람들을 죽인 것에 분노하였고, 호민관이었던 '가이우스 멤미우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유력자들을 비난했다. 원로원은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를 사령관으로 선출하고 누미디아에 선전포고 하였다. 유구르타는 이번에도 자신의 아들인 옥시타스와 사절들을 로마로 파견하여 뇌물을 주고 무마하려고 했으며, 베스티아는 사절단과 접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안좋은 분위기를 느낀 원로원은 베스티아를 제지하고, 유구르타의 항복없이는 협상을 할 수 없다며 차단하였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싸울 생각이 없어보이는 베스티아 였지만, 누미디아에 상륙하여 여러 마을과 요새를 공격하면서 로마 군단은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현지에서 베스티아는 다시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는 평화협상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로마로 귀환해 버린다. 로마에서 다시 법무관을 유구르타에게 파견을 하여 경고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자, 유구르타는 직접 로마로 가서 재판을 받기로 한다. 유구르타는 그의 심복인 '보밀카르'를 대동하고 로마로 입성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유구르타에게 적대적이었지만, 그가 재판을 받을때 호민관인 '가이우스 바이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도와준다. 시민들은 바이비우스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는 것을 알고 비난하였지만 재판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그때 유구르타의 사촌인 굴루사의 아들 '마시바'가 로마에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원로원을 설득하여 자신이 누미디아의 왕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유구르타는 보밀카르를 시켜서 마시바를 암살하게 하였다. 마시바는 암살되었지만 암살범이 체포되면서 이러한 음모가 고발되었는데, 유구르타는 암살 사주 혐의 재판에서도 배심원들을 매수하여 무죄를 선고 받으면서 풀려나게 된다. 원로원은 로마에서 더 이상 합법적인 절차로 그를 처벌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자, 당장 로마를 떠나도록 요구했다. 유구르타는 로마를 떠나면서 '사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팔려서 망하게 될 도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당시의 로마는 이미 부패가 상당히 심각하여 제대로 된 사회 질서가 유지 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에서는 다시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단을 누미디아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지지부진하였고 몇몇 지휘관들 뿐만 아니라 병사들까지 유구르타에게 뇌물로 매수되어있었다고 한다. 결국 유구르타의 부대에게 로마 군단은 포위되었으며, 뇌물을 받은 동맹시 병사들을 이탈하였고, 로마 군단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귀국하게 된다. 기원전 109년 집정관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를 사령관으로 다시 로마 군단을 파견하였는데, 메텔루스는 그 동안의 전황을 보고서는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어 휘둘리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했다고 한다. 로마 내부에서도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유력자들을 색출해서 추방했다고 한다. 누미디아에 상륙한 로마 군단을 상대로 유구르타는 여러번에 걸처 매수하려고 시도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로마 군단에서의 종군 경험을 살려 분전하였지만 패배하였다. 그러자 유구르타는 전면전을 피하고 로마 군단을 견제하면서 로마군 분견대와 소규모 접전을 반복하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메텔루스의 부관으로 복무하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집정관 선거에 참여하고 싶다며 자신의 복무를 해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메텔루스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면서 마리우스와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누미디아에서는 유구르타의 심복인 보밀카르가 반역의 음모를 꾸미다가 처형되었다. 기원전 108년 로마 군단은 유구르타가 근거지로 있던 '탈라'를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성을 빠져나가 자신의 장인인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쿠스 1세'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다음해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되어 누미디아 사령관으로 취임하였고, 자신의 부하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사령관으로 오는 것이 불만스러웠던 메텔루스는 군단의 인계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은 보쿠스1세와 유구르타의 부대와 몇번의 전투를 치루었는데, 로마 군단이 승리하여 누미디아의 수도인 키르타에 입성하였다. 기원전 106년 계속되는 패배로 유구르타 몰래 보쿠스1세는 화해하기 위하여 로마 군단에 사절을 보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파견하여 중재하였고, 유구르타를 생포하여 로마에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보쿠스1세의 배신으로 유구르타는 포박되어 로마에 압송되었고, 그 대가로 마우레타니아는 누미디아의 서쪽 영토 일부를 받았다. 남은 누미디아는 유구르타의 동생인 '가우다'가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유구르타는 부패한 나라를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자부심 넘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선을 넘어서는 돈으로 무마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도 보여줬다. 한때 부패한 로마를 돈으로 농락하였지만, 로마에 사로잡힌 유구르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취급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의 부패는 이미 누구나 다 알지만 외면되는 문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