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 평민파 정치가 「가이우스 마리우스」
- 역사
- 2023. 2. 1.
평민 출신 로마의 영웅
보통 3개 이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다른 로마의 인물들과 달리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2개의 이름 밖에 없는데, 이는 그가 귀족이 아닌 평민이며, 별다른 배경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는 몇번의 법 개정을 통하여, 평민 출신의 사람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지만, 귀족들처럼 부와 지위, 연줄이 없는 평민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에 평민들은 공직에 진출하고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귀족들과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귀족의 후원을 얻는 대신 그들이 이익을 대변하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많은 로마의 유명인들과 다르게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출세는 상당히 느렸으며, 그만큼 철저하게 그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로마 출신도 아닌 '라티움' 남쪽의 '아르피눔' 출신으로, 그가 태어나기 약 30년전이 되어서야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인정 받을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아르피눔에서는 상당한 지주가 출신으로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런 시골의 지위따위는 로마에서는 아무런 평가 대상이 되지 못 했다. 그는 상당한 재산을 이용하여 로마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거 같은데, 그가 24살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밑에서 '히스파니아' 지역의 '누만티아'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57년 태생으로 '그라쿠스 형제'와 동시대 인물인데, 당시에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기득권층과 평민층의 충돌이 상당히 격화되는 시기였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 본인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의식은 별로 없었던 것 같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그에 대한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다. 그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의 후원을 받으면서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사망하고 2년 후에 호민관에 당선하였고, 그의 출신으로 인해 민중파의 지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후 출마한 안찰관 선거에서는 낙선하였고, 기원전 115년에 법무관 선거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고,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그는 율리우스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유명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라고 한다.
유구르타 전쟁
기원전 112년 '누미디아' 왕국의 '유구르타'가 로마와 갈등하면서 '유구르타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에서는 처음에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를 사령관으로 선출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하였으나, 그의 군단은 누미디아에 상륙하였지만,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서는 전쟁이 종식되었다고 선포하고는 로마로 돌아와버렸다. 로마 내부의 부패와 유구르타의 뇌물과 정치공작으로 추태를 보여주던 로마는,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의 패배를 기점으로 유구르타와 타협이 불가능해졌다. 기원전 109년 로마는 집정관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유구르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미디아로 다시 군단을 보냈는데,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며, 자신의 후원을 받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부관으로 데리고 참전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의 지휘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곧 열릴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로마로 보내달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며, 가이우스 마리우스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아들이 집정관에 당선될때까지 기다리라며 조롱하였다고 한다. 결국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하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을때까지 그를 북아프리카에 잡아두었다. 이 당시 로마는 북쪽에서는 게르만족과 남쪽에서는 누미디아의 유구르타와 싸우고 있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유구르타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당선되게 된다. 북아프리카 지역 총사령관으로 자신의 부하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어서 돌아온다고 하자,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군단의 인수를 부하들에게 맡겨버리고서는 혼자 로마로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104년까지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로마의 걱정거리를 하나 없에버렸고, 로마에 돌아와서 개선식을 진행하면서 생포한 유구르타를 처형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 그의 부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남쪽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북쪽의 문제는 겆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게르만족의 숫자는 거의 20만에 달했는데, 그들은 갈리아족 영토를 휩쓸고 다녔으며,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의 군단은 차례로 격파 당했다. 그들이 더 남하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로마에서는 12개의 군단에 8만명 규모의 전례없을 정도의 대군단을 파견하였는데, 남부 갈리아 지역에서 일어난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 군단은 참패하여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이후 게르만족은 히스파니아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당장의 로마의 안전은 확보되었지만, 로마는 또 한번 큰 혼란에 휩싸였다. 로마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귀환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열광하여, 그를 집정관으로 연임시키며 게르만족을 물리쳐줄 것을 바랬다. 그러나 로마 군단은 이미 근본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빈부격차로 인해 로마에서 무산자 계급이 증가하면서, 로마 군단의 질적 저하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개혁을 감행하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미 8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은 상황에서 새로운 군단을 조직해야 했는데, 그는 국가에서 장비와 급료를 지급하게 하였고, 퇴역 후에는 농토를 나눠주고 퇴직급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개혁 내용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내용과도 부합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개혁 내용이 군대에 한정되었고, 당시가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반발없이 받아들여졌다. 충분한 병사들이 모여들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더 나아가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바로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오지 않았고, 로마에서는 불안에 떨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계속 집정관에 연임시켜 무려 5번이나 연속으로 집정관의 자리에 계속 있게 된다. 기원전 102년 게르만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서 이동을 시작하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출정하였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먼저 게르만의 테우토네스족을 상대하였다. 그들은 당시 전사만 12만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당시 게르만족들은 거주할 땅을 찾아서 모든 부족민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형태 였기 때문에 다소 과대포장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게르만족은 계속된 승리로 인해서 로마 군단을 얕보고 있었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들을 유인하여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섬멸하였다. 게르만족의 다른 한갈래는 킴브리족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알프스를 넘어서 침략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카툴루스는 산맥 아래 평원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킴브리족의 공격을 받자 후퇴하였다. 다음해의 집정관 선거를 위해 로마로 돌아와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알프스까지 북진하였다. 기원전 101년 루크레이투스 카툴루스와 합류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킴브리족과 대치하였는데, 킴브리족은 2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킴브리족은 정착할 땅을 요구하였지만 로마는 거절하였고,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로마 군단에 패배하면서 전멸하게 된다. 이주할 땅을 찾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성원 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많았는데, 전세가 기울자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로마 시민들은 이에 열열히 환영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의 뜻으로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6번째 집정관 자리에 오르게 된다. 로마 시민들을 그를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갈리아족의 위협에서 로마를 지켜낸 '카밀루스'에 이은 3번째로 로마를 건국한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군사 영웅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특히나 그의 출신과 정치행보 때문에 평민으로부터 지지가 높았는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일명 '포풀라레스'(평민파)라고 불렀다. 반대로 그의 정치적 최대 라이벌이 되는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옵티마테스'(원로원파)라고 부르며 격력하게 대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마치 현대의 보수기득권층과 진보개혁파의 갈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는 주로 정치의 장에서 언론과 여론을 통해서 싸우지만, 이 당시에는 이미 사병화되기 시작한 로마 군단을 이용해 싸우게 된다. 그러나 이런 가이우스 마리우스 뜻하지 않은 몰락을 겪게 된다. 당시 평민파의 호민관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비호를 받고 있었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그를 이용하여 게르만족과의 싸움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투르니누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은 야심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인기를 등에 엎은 그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도 유사한 여러 개혁들을 추진하였고, 이는 기득권층의 상당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기원전 99년 호민관에 다시 당선된 사투르니누스는 결국 선을 넘게 되는데, 자신이 지지하는 집정관 후보가 자격이 되지 않아 입후보를 거부당하자, 상대 집정관 후보를 때려죽이고서는, 집정관 후보 자격을 고치는 법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원로원은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고,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그들을 진압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사적 능력은 뛰어난 그였지만, 정치적 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잘 들어나는 부분인데, 그는 평민파의 정치적 구심점으로서 그들을 통제하지도 못 했을 뿐더러, 그들을 감싸주지도 못하고 체포하여 신전에 구금하였을 뿐이다. 결국 원로원의 지지자들이 몰려가서 소요사태가 일어났고, 혼란 중에 사투르니누스가 사망하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대한 정치적 지지도 추락하게 된다. 그 결과 6번째 집정관 임기가 끝나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전면에서 물러나게 된다.
마리우스의 재기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을 상당히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한번 기회가 오자 그는 적극적으로 다시 전명에 나서게 된다. 그가 정계에서 물러난뒤 약 10년뒤 이탈리아 반도에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면서, 로마는 다시 한번 그의 군사적 재능을 요구하였다. 비록 당시 집정관으로 선출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군사 고문으로 지명된 것이긴 했으나, 로마가 다시한번 그의 재능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그의 조언을 무시하고 섣불리 행동하다가 전사하였다. 전쟁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법을 제정하여 로마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종결되게 되지만, 전쟁 동안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훌륭하게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율리우스법으로 인해 또 다시 갈등일 일어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로마 시민들이 대거 늘어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평민회는 약화되고 원로원은 상대적으로 강화되게 되었는데, 이 새로운 로마의 구성원들을 평민회에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잡음이 나오게 되었다. 로마에서는 전통적으로 35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투표하여, 그 가운데 과반수의 찬성을 통해 투표 결과를 확정하였는데, 새로운 로마 시민들을 35개 그룹에 전부 할당하자는 측과 8개의 그룹에만 할당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로마 시민들을 이탈리아의 시민들에 맞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였고, 이탈리아 시민들은 같은 로마 시민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원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호민관인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35개 그룹에 할당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그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에 기대기로 하였다. 이때 로마의 외부에서는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로마가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집정관에 임명하여 로마 군단의 지휘권을 주고 있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도와주는 대신 폰토스 원정 군단의 지휘권을 요구하였다. 아마 그의 군사적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줌으로 인해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되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의 밑에서 근무했던 퇴역병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법안을 지지하게 했고, 소요사태를 일으켜 혼란한 와중에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법안과 폰토스 원정 군단의 지휘권을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일임한다는 법안을 가결 시키게 된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남부의 '놀라'에서 원정 군단의 편성을 이미 마친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 소식을 듣고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집정관이 로마를 공격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로마를 탈출하여 도주하였다. 실제로 군단 지휘관들은 대부분 술라에게 불복종하였으나, 병사들은 앞으로의 봉급이나, 퇴직급 등의 지급에 대하여 사령관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로마로 입성한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에 대해 연설 한 후에, 원로원을 찾아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하고, 술키피우스 루푸스의 모든 법안의 철회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행동은 로마 시민들에게 전혀 지지받지 못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까운 집정관 후보들을 모두 낙선시키고, 반대되는 후보들을 당선시켰다고 한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잡혀서 처형되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체포되었지만, 그의 인기 때문에 함부로 처형하지는 못 했다고 한다. 이에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폰토스로 출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기로 한다.
피의 숙청
기원전 87년 집정관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였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두 집정관에게 자신의 법안을 철회하지 못하도록 맹세하게 하고서는 원정을 떠났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평민파 정치인이었는데, 그는 술라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자 본심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법안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하자 원로원은 다른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이용해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로마 밖의 도시들을 돌며 지지를 호소하자, 원로원은 그가 코르넬리우스 술라처럼 군사를 모아서 돌아올까, 그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해 버렸다. 궁지에 몰린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연합하였고, 많은 지지자들을 모아 로마로 돌아갔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반대하던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포함하여 반대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때 50여명의 원로원 의원과 1000여명의 유력자들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서 두 사람은 선거와 절차를 무시하고 집정관에 취임하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로서 7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하였고, 그가 정치권의 전면에 다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취임후 고작 몇일 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병으로 사망한 것 같은데, 이후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일인 집정관으로 로마를 통치하다가, 폰토스 원정에서 돌아오는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견제하기 위해 군단을 편성하던 중 병사들의 폭동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뒤이어 도착한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대대적인 숙청에 의해 평민파는 전면에서 퇴장하게 되고, 로마는 전통적인 원로원 위주의 통치로 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