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쟁탈전 '바예지드 2세'는 1447년 '메흐메트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후계자들이 지방 도시의 총독으로 내려가서 실무 경험을 쌓고, 자신만의 세력을 모아 술탄의 사후에 형제들 사이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처럼 계속되었는데, 메흐메트 2세는 이러한 후계자들의 경쟁 행위를 아예 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바예지드 2세도 어린 시절 '아마시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하였는데, 당시 대재상이었던 '카라만르 메흐메트'는 '콘야'의 총독이었던 '젬'이 권력을 승계할 것으로 기대하여, 그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바예지드 2세를 지지하고 있던 예니체리들이 폭동을 일으켜 카라만르 메흐메트를 살..
세금을 징수하는 군대 고대 로마나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의무이자 권리였던 군역에 종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점 상비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상시 유지되는 군대는 그만큼 많은 비용을 필요로 했습니다. 따라서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상비군을 최소한으류 유지하면서, 필요할때만 빠르게 군대를 이용하기 위하여 용병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용병은 비용의 절감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전쟁터에서 사망하여 생기는 문제를 방지할 수도 있었으며, 비용을 부담할 수만 있다면 공동체 보다 더 큰 규모의 병력을 확보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신뢰도와 성실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이러한 군사적 문제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용병을 이용하기 위한 비용의 문제도 ..
두번의 즉위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 '에디르네'에서 '무라트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메흐메트 2세는 위로 형이 두명이나 있었던데다가, 무라트 2세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는지, 태어난지 2년만에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아마시아'로 보내졌다. 그 후 3년뒤 맏형이 사망하자 대신 아마시아 총독의 자리에 올랐다가, 이후 둘째형이 아마시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메흐메트 2세는 '마니사' 총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443년에는 둘째형도 사망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 2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44년 무라트 2세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마흐메트 2세에게 술탄직을 넘겨주었다. 당시 오스만 술탄국은 헝가리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연합군과 평화협상을 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12세의..
술탄의 노예 카프쿨루 오스만 제국에는 술탄 '바예지드 1세' 치하에서 일종의 노예로 구성된 수행원을 두는 제도가 있었는데, '카프쿨루'(Kapıkulu Ocağı)라고 불렀다. 이 노예들은 전쟁포로나 국가에 이해 구매된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술탄이 시종같은 역할들을 하였는데, '무라트 1세'때에 와서 다른 세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한체 술탄에게만 충성하는 군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들을 이용해 군대를 편성하였다. 이렇게 편성된 술탄의 직속 부대는 기병대로 구성된 '카프쿨루 스파히'와 보병 중심의 '예니체리'로 불리웠다. 초기에 이들은 계속해서 노예로 인원이 충원되었지만, 머지않아 '데브시르메'라는 새로운 차출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데브시르메 데브시르메는 '아동할당세' 혹은 '혈통세' 등으로 번역..
두 무스타파와의 싸움 '무라트 2세'는 1404년 '메흐메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라트 2세는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을 사실상 종식시키고 오스만 술탄국의 단독 통치자가 된 1413년에 아버지처럼 '아마시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9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공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421년에 메흐메트 1세는 사망하면서 측근에게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아마시아에 있는 무라트 2세를 수도 '에디르네'로 급히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메흐메트 1세의 죽음은 무라트 2세가 에디르네에 도착할때까지 비밀에 부쳐졌으며, 에디르네에 도착한 무라트 2세는 무난하게 권력을 승계할 수 있었다. 사실 메흐메트 1세는 무라트 2세가 동생들과 영토를 나누어 가지도록 하였..
노부나가의 일등공신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는 1535년 '니와 나가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와의 집안은 본래 '시바'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시바 가문의 힘이 줄고 '오다' 가문이 득세하면서, 1550년부터 나가히데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가 1552년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멍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노부나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일부 가신들이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를 앞세워 반목하였다. 그러나 나가히데는 이 시기에도 노부나가의 편에서 섬겼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보다 1살 어렸는데, 15세 무렵부터 측근으로 섬겼기 때문에, 오다 가문의 주요 전투에도 대체로 참전하였다. 노부나가..
공위시대 '메흐메트 1세'는 1379년경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99년에 '아마시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현직에서 공무 수행의 경험을 쌓으며, 이른바 후계자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402년 오스만 술탄국과 티무르 제국이 충돌하였는데, 바예지드 1세는 다섯명의 아들을 대동하고,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대패하였으며, 장남인 '쉴레이만'과 차남 '이사', 사남 '메흐메트 1세'는 탈출 할 수 있었지만, 바예지드 1세 본인과 삼남 '무스타파'와 막내 '무사'는 티무르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 패배로 인해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당부분에서 '티무르 베그 구르카니'에 의해 튀르크계 제후국들이 재건되었으며, 발칸 반도 지..
신속 과감한 번개 '바예지드 1세'는 1354년경 오스만의 수도 '부르사'에서 '무라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었을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는데,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바예지드 1세는 신속하고 과감한 용병술을 구사하여, 번개라는 뜻의 '이을드름'(Yıldırım)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1389년 오스만군과 세르비아군이 맞붙은 '코소보 전투'의 승리 직후 무라트 1세가 세르비아 귀족에게 암살당하였는데, 당시 무라트 1세를 수행하고 있던 바예지드 1세는 함께 참전하였던 동생 '야쿱'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막사로 불러내었다. 아직 무라트 1세가 암살당한 사실을 몰고 있던 야쿱은 순순히 부름에 응하였고, 야쿱이 막사에 들어서는 순간 바예지드 1세에게 살해당하였다. 비정한 결..
연방 국가 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 흔히 '미합중국'이라고도 부르는 미국은 여러 주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연방국가이다. 미국은 수도인 워싱턴 D.C.와 50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각 주들은 사실상 각각의 국가나 다름없다. 미국의 주는 연방 아래에 모여 있긴 하지만, 각각의 주들이 행정, 입법, 사법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주 정부나 주 의회의 구성도 조금씩 다르고, 주 방위권도 가지고 있어 주 방위군이 조직되어 있다. 하나의 연방 아래에 속해있기 때문에 통행이 자유로운데 반해 각 주 마다 법이 다르다 보니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주에 걸친 사법적 문제에 의해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인 185..
발칸 반도의 정복자 '무라트 1세'는 1326년에 오스만 베이국의 군주인 '오르한'과 아내 '닐뤼페르 하툰'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무라트 1세의 어머니 닐뤼페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노예 출신이며, 기독교 신자였다고도 한다. 아버지 오르한은 1359년경 사망하였는데, 유능한 장군이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쉴레이만'이 오르한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후계자 계승을 두고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무라트 1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6세'의 딸인 '테오도라 칸타쿠지니'의 아들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 싸움은 수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무라트 1세가 오스만 베이국의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싸움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권력을 잡은 무라트 ..
원로원 의원 타키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56년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속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타키투스는 부유한 에퀴테스 계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로마 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77년경 유능한 원로원 의원이자 로마 군단 지휘관이었던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부터 공직경험을 쌓기 시작하여, 81년에는 재무관에 당선되었고, 88년에는 법무관에 당선되기도 하는 등, '쿠르수스 호노룸'의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켰다.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로마 밖으로 나와 군단의 고문을 맡기도 했는데, 당시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 대립하여 여러 원로원 의원들이 숙청되었..
오스만 베이국의 새 수도 흔히 '오르한 가지'라고 불리우는 오르한은 1281년경 오스만 베이국의 수도였던 '쇠위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299년 아버지인 '오스만 1세'가 독립국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오스만 베이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오스만 베이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비티니아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1326년에 오스만의 군대는 오르한의 지휘아래 '부르사'를 함락시켰다. 이 시기 오스만 1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오르한이 오스만 베이국을 물려받게 되었다. 오르한에게는 '알라앗딘'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형제간이 사이가 돈독했기 때문에 본래는 튀르크족의 전통에 따라 나라를 나누어 갖자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알라앗딘은 이 권유를 거절하고 함께 나라를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