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꼭두각시 술탄 '무라트 4세'는 1612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니예에서 술탄인 '아흐메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622년 형이자 술탄이었던 '오스만 2세'가 '예니체리'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삼촌 '무스타파 1세'가 다시 술탄으로 복위하였는데, 무스타파 1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623년 다시 강제로 퇴위 당하였다. 이에 무라트 4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였는데, 당시 무라트 4세는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인 '마흐페이케르 쾨셈 술탄'이 실권을 잡고 권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이 혼란을 틈타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가 침공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빼았겼고, 아나톨리아 북부지역에서는 연이어 폭동이 일어났다. 1631년에는 예니체리들이 다..
적극적인 통치 '오스만 2세'는 1604년 콘스탄티니예의 '톱카프 궁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재능이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은데, 시에 조예가 깊었으며 오스만어 뿐만 아니라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아버지인 아흐메트 1세가 병으로 사망하고, 삼촌인 '무스타파 1세'가 술탄으로 즉위하였는데, 무스타파 1세는 오랜 카페스 생활로 인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무스타파 1세는 신하들의 터번을 강제로 벗기거나, 수염을 잡아당기는 등 기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듬해인 1618년 강제로 폐위되었고, 오스만 2세는 15세의 나이로 술탄에 즉위하였다. 오스만 2세는 어린나이였지만 즉위..
창의 마타자에몬 '마에다 토시이에'는 1538년경 '오와리'의 지방 토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1년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들어가 모시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인 1552년에 오다 가문의 내전격인 가야즈 전투(萱津の戦い)에 처음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1556년에 벌어진 '이노우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며, 노부나가가 오다 가문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창설한 일종의 친위대격인 '아카호로슈'의 일원이 되어 출세를 시작하였다. 1558년에는 '호슌인'(마츠)와 결혼하였고, 이 즈음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친분을 가졌으며, 서로의 부인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부부동반으로 교류를 하였던 것 같다. 이듬해인 1559년 같은 아카호로슈의 일원인 '주아미'와의 갈등으로 그를 살해하여, 노부나가 휘하에서 쫒..
형제 살해를 방지하기 위한 개혁 '아흐메트 1세'는 1590년 '메흐메트 3세'의 아들로 '마니사'에서 태어났다. 1603년에 메흐메트 3세가 사망하자, '사피예 술탄'의 주도로 13세였던 아흐메트 1세가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였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계승한 관한 법률이 대대적으로 개혁되었는데, 술탄의 모든 남자형제를 살해해야 된다는 기존의 내용이 없어지고, 대신 황궁 내의 하렘 한쪽 구석에 만들어진 '카페스'(Kafes)라는 공간에 유폐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권력의 계승은 술탄의 가장 능력있는 자식이 잇도록 하였으며, 술탄이 전쟁이나 병으로 사망하게 되면, 카페스에서 지내던 후계자들 중 한명이 권력을 계승하였다. 이러한 변혁에 대해서는 갑작스러운 술탄의 죽음으로 인한 권력의 공백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 '메흐메트 3세'는 1566년 아버지 '무라트 3세'가 '마니사'의 총독으로 있을때, 마니사에서 어머니 '사피예 술탄'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595년 무라트 3세가 사망하면서 메흐메트 3세가 다음 술탄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때 19명의 형제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딱히 메흐메트 3세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법률에 술탄의 형제들을 처형하도록 되어있기도 하였고, 무라트 3세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로 하렘에서만 생활하면서 100여명에 가까운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메흐메트 3세가 즉위하는 동안에도 서유럽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루돌프 2세'를 중심으로, '트란실바니아'와 '몰다비아', '왈라..
부전자전 '무라트 3세'는 1546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 '셀림 2세'와 하렘의 '누르바누 술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누르바누 술탄은 본래 '라셀'이라는 이름의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누르바누 술탄은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으로, 바다를 여행하다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술탄에게 바쳐졌다고도 한다. 무라트 3세는 셀림 2세가 '마니사' 총독으로 있을때 마니사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때부터 프랑스어와 아랍어 등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1558년에 셀림 2세와 동생 바예지드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반목하자, 쉴레이만 1세가 두 사람의 영지를 변경하였는데, 이때 셀림 2세가 남쪽의 '카라만'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자, 무라트 3세는 콘스탄티니예로 보내져 쉴레이만 1세의 곁에서 지냈다..
압도적인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처음에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근거지로 한 소국에 불과했지만, 이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유럽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에 서유럽에서는 몇차례 십자군을 편성하여 보내기도 하였는데,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오스만군에게 패배하였으며, 1444년에는 '바르나 전투'에서 '바르나 십자군'이 패배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453년에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도 하였다.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쉴레이만 1세'의 통치기에 오스만 제국은 흑해와 에개해를 내해로 삼고, 서쪽으로는 헝가리를 장악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에 진출하여 예맨과 아덴까지 진출하여, 인도 일부지..
주어진 술탄의 권력 '셀림 2세'는 1524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인 '쉴레이만 1세'와 황후 '휘렘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다. 셀림 2세는 슬라브계였던 황후를 닮아 금발이었다고 한다. 본래 쉴레이만 1세는 하렘의 후궁인 '마히데브란 술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무스타파'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같은 후궁이었던 휘렘이 정식으로 쉴레이만 1세와 결혼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은 전통적으로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고, 주로 하렘의 노예 출신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후계자 경쟁을 통해 차기 술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다른 경쟁상대가 될 형제들이 유년기에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경쟁과정 없이 술탄의 자리를 차지할 ..
노부히데의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는 1492년경 태어났는데, '오다 노부사다'의 신하였던 아버지를 따라, 노부사다의 아들인 '오다 노부히데'를 섬겼으며, 노부히데의 중신으로 주로 외교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마사히데는 다도나 와카 등에도 능했는데, 1533년에 '오와리국'을 방문한 공가의 '야마시나 토키츠구'로부터 칭찬받을 정도 였다고 한다. 1543년에는 노부히데의 대리인으로 교토로 헌상품을 보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 조정과의 외교 활동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534년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자, 노부히데에 의해 후견이 중 한명이 되었으며, 노부나가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1547년에 노부나가의 첫 전투때에도 후견인으로 참전하여 보좌하였다. 또 1548년에는 노부히데와 '미노국'의..
오스만 제국의 후계자 '쉴레이만 1세'는 1494년 '트라페준타'에서 '셀림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7세 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1세에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웠고, 15세에는 '마니사'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쉴레이만 1세의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형제들은 어린시절에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차기 술탄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7세에는 콘스탄티니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에게 해의 '사루칸' 총독으로 임명되는 등 통치 경험을 쌓았는데, 이때 '카눈나메'라는 오스만 세속 법전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쉴레이만 1세는 셀림 1세가 외국으로 원정을 나가면, 대리인으로 아버지가 부재중인 오스만 제국을 관리하였으며, 1520년 셀림 1세가 사망하자 26살의 젊은 나이로, ..
냉혹한 후계자 경쟁 '셀림 1세'는 1470년경 아마시아에서 바예지드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예지드 2세의 후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전통에 따라 지방 총독으로 보내졌는데, 장남인 '아흐메트'는 아마시아 총독으로 부임하였고, 그 다음 '호르후드'는 안탈리아로 보내졌으며, 셀림 1세는 '트라페준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는 부왕이 서거 하였을때 콘스탄티니예에 가장 먼저 입성한 자식이 권력을 승계하였던 오스만 제국의 법상으로 보았을때, 당시 바예지드 2세가 어느 아들을 차기 술탄으로 생각했을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니예와 임지의 사이의 거리로 보았을때 사실상 승계구도에서 밀려나있던 셀림 1세는 이를 뒤집기위해 노력하였다. 1511년 셀림 1세는 흑해 북쪽의 '크림 칸국'의 협력을 얻어내..
오다가의 가신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는 1514년경 '오와리국'의 토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히데사다는 오랫동안 '미치카츠'(通勝)로 알려져있었는데 여러 연구 결과 히데사다로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사다는 아버지 '하야시 미치야스'와 함께 '오다 노부히데'의 휘하로 들어갔고, 거기서 정치나 외교 부분에 수완을 발위하여 중신이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자 그 후견인으로써 가로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546년에는 '후루와타리 성'에서 노부나가의 성인식 때 시중을 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노부나가가 노부히데의 장례식 때 벌인 일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다. 1554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 인군의 '미카와국'으로 진군하자, 노부나가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하였는데, 이때 히데사다는 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