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패자 오스만 제국을 흔든 「레판토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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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압도적인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처음에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근거지로 한 소국에 불과했지만, 이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유럽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에 서유럽에서는 몇차례 십자군을 편성하여 보내기도 하였는데,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오스만군에게 패배하였으며, 1444년에는 '바르나 전투'에서 '바르나 십자군'이 패배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453년에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도 하였다.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쉴레이만 1세'의 통치기에 오스만 제국은 흑해와 에개해를 내해로 삼고, 서쪽으로는 헝가리를 장악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에 진출하여 예맨과 아덴까지 진출하여, 인도 일부지역에서 전투를 치루기도 하였다. 또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수중에 넣고, 1538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하는 '신성 동맹'을 '프레베자 해전'에서 패배시켜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갈등

1570년 '셀림 2세'가 통치하는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인 키프로스를 침공하였다. 키프로스는 동 지중해에 떠 있는 큰 섬으로, 동 지중해 전체의 무역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술을 좋아하는 셀림 2세가 키프로스산 와인을 차지하기 위해서 침공했다고도 한다. 실제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키프로스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며 점유를 인정받고 있었는데, 셀림 2세의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 친구의 종용을 받아 협정을 깨고 침공하였다고 한다. 한편 갑작스럽게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황 '비오 5세'를 설득하여, 신성 동맹을 소집하여 함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수도인 '니코시아'까지 함락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합 함대는 제대로된 전투 한번 치루지 않고 그대로 회군해 버렸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시 한번 교황을 설득하였고, 결국 이듬해인 1571년에 베네치아, 스페인, 나폴리, 시필리아, 사르데냐, 제노바, 몰타의 구호기사단 등을 구성원으로 하는 신성 동맹 연합 함대가 다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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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과 오스만 제국의 대해전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신성 동맹의 연합 함대는 발칸 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이 '레판토'(현재이 나프파크토스) 부근에서 교전을 시작하였는데, 레판토는 코린토스 만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트라이코스 만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다. 양 함대 모두 200척 이상의 갤리선과 50,000명에 달하는 선원들, 30,000명에 정도의 전투원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해전에서 주력함은 아직 노를 젓는 갤리선들로 대포를 설치하여 포격을 하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화승총이나 활을 사용한 원거리 공격과 선상에서 벌이는 백병전 위주의 전투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신병기인 포격전 중심으로 설계된 6척의 '갈레아차'가 큰 활약을 하기도 하였는데, 오스만 함대는 이 전투에서 갈레아차를 처음보고 수송선인 줄 알고 섯불리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신성 동맹의 연합 함대에 참패하였다. 연합 함대는 약 40척의 함선이 침몰 또는 파손된데 반해, 오스만 함대는 200척 이상 손실하였으며, 신성 동맹에서 7,500명 가량이 전사하고 20,000명 가량이 부상당한데 비해, 오스만군은 30,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3,500명 가량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총사령관인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해전의 판도 변화에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신성 동맹의 연합 함대에는 포격전 중심의 신병기 갈레아차가 배치되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대포로 무장하였고, 병사들도 총기로 무장하여 화력적으로 우위에 서 있었다. 오스만 함대도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모자란 화승총과 부족한 연사력을 보완하기 위해 쇠뇌와 활을 사용하였다. 또 오스만 함대의 대포는 연합 함대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함대전이 포격전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면, 오스만 제국의 레판토 해전의 패배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돈 키호테'로 유명한 스페인의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도 이 전투에 참전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부상을 입어 왼손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국을 흔드는 잔물결

신성 동맹은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에 승리하였지만, 배네치아 공화국은 키프로스를 되찾아 올 정도의 여력이 없었고, 결국 강화조약을 맺어 정식으로 키프로스를 오스만 제국에 할양하였으며, 배상금까지 지불하면서 전쟁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은 금세 함대를 제건하였으며, 1574년에는 스페인이 점유하고 있던 튀니지를 함락시킨다. 그러나 이 패배로 인한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오스만 함대는 전체적으로 질적으로 하락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반면 스페인 함대는 이 승리를 통해 큰 명성을 얻었고, 후에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라고 까지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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