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세번째 군주 「메흐메트 3세」
- 역사
- 2023. 6. 17.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
'메흐메트 3세'는 1566년 아버지 '무라트 3세'가 '마니사'의 총독으로 있을때, 마니사에서 어머니 '사피예 술탄'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595년 무라트 3세가 사망하면서 메흐메트 3세가 다음 술탄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때 19명의 형제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딱히 메흐메트 3세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법률에 술탄의 형제들을 처형하도록 되어있기도 하였고, 무라트 3세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로 하렘에서만 생활하면서 100여명에 가까운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메흐메트 3세가 즉위하는 동안에도 서유럽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루돌프 2세'를 중심으로, '트란실바니아'와 '몰다비아', '왈라키아' 등이 참여한 십자군의 공세에 상당히 불리안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해에 에스테르곰과 비셰그라드 같은 헝기라의 요충지를 공격당해 상실하는 등 오스만 제국은 연패를 이어갔다. 메흐메트 3세도 할아버지인 '셀림 2세'나 아버지 무라트 3세처럼 통치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실권은 사실상 사피예 술탄이 계속 쥐고 있었지만, 1596년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계속되는 신하들의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전선에 나가게 되었다. 이는 '쉴레이만 1세' 이후 약 30년만에 이루어진 오스만 제국 술탄의 친정으로, 덕분에 오스만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메흐메트 3세가 이끈 오스만 군은 에게르를 수복하였고, 이어서 '케레스테츠 전투'(Keresztes)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3세는 전투 이전부터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가고 싶어했는데 신하들이 만류하여 붙들어놓고 있었고, 결국 전투에서 승리하자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가 개선식을 거행했다. 메흐메트 3세는 이러한 승리와 환호에 도취되었는지, 이듬해에도 친정에 나서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설에 의하면 과식과 과음 등으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의사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 진행되어 십자군이 죄르를 점령하고, 오스만군이 너지카니저를 점령하는 등 공방전이 계속되었지만, 양 세력은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못하고 전쟁은 10여년간 더 지속되었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반란과 최후
1600년에는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카라야즈 압뒬할림'이 '우르파'를 장악하고, 술탄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압뒬할림은 한때 진압군에게 패하여, 흑해 인근의 삼순까지 도주하기도 하였지만, 이내 진압군을 물리치고, 퀴타히아까지 진군하여 도시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이 반란은 결국 이듬해 진압되기는 하였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반란은 계속되었고, 1602년부터는 페르시아와의 전쟁도 시작되었다. 메트메트 3세의 통치시기에도 오스만 제국과 영국의 우호관계는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 영국은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고 상당히 노력했다고 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기계장치 오르간 등을 선물로 보냈는데, 메흐메트 3세는 이때 이 선물을 싣고 온 영국의 상선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해군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함선을 건조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메흐메트 3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603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한 원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당시 아끼던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후 사피예 술탄의 주도하에 '아흐메트 1세'가 다음 술탄으로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