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한번째 군주 「셀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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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주어진 술탄의 권력

'셀림 2세'는 1524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인 '쉴레이만 1세'와 황후 '휘렘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다. 셀림 2세는 슬라브계였던 황후를 닮아 금발이었다고 한다. 본래 쉴레이만 1세는 하렘의 후궁인 '마히데브란 술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무스타파'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같은 후궁이었던 휘렘이 정식으로 쉴레이만 1세와 결혼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은 전통적으로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고, 주로 하렘의 노예 출신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후계자 경쟁을 통해 차기 술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다른 경쟁상대가 될 형제들이 유년기에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경쟁과정 없이 술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쉴레이만 1세가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깬 또 다른 일이 있었는데, 바로 휘렘과 정식으로 결혼한 일이다. 쉴레이만 1세와 결혼하면서 휘렘은 오스만 제국의 첫번째 정식 황후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전과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휘렘이 황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깨고 자신의 아이가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고, 이에 사위였던 '뤼스템 파샤'와 함께 음모를 꾸며, 유력한 후계자였던 무스타파를 반역의 혐의로 고발하였다. 이로서 쉴레이만 1세가 아직 실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사실상 후계자 경쟁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무스타파가 반역죄로 처형되자, 셀림 2세가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후계자 경쟁이 이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는데, 같은 휘렘의 아들인 동생 '바예지드'도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휘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휘렘이 사망하자, 노골적으로 반목하기 시작하였다. 쉴레이만 1세는 두 형제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자, 두 사람의 영지를 바꾸는 방식으로 중재하려하였는데, 바예지드는 쉴레이만 1세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며 지연시켰다고 한다. 이에 쉴레이만 1세가 아예 후계자로 셀림 2세를 지명하고, 당시 부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셀림과 함께 바예지드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후계자 경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무시하고, 사실상 쉴레이만 1세와 휘렘임 셀림 2세를 술탄으로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되었든 이 경쟁에서 패배한 바예지드는 페르시아로 도망쳐 의탁하였지만, 결국 페르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협상하면서, 바예지드를 포함한 일가족 모두 처형되었다. 이후 1566년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 원정 중에 사망하면서, 셀림 2세는 정식으로 오스만 제국의 열한번째 군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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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색잡기 술탄

오스만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셀림 2세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과 다르게 군사분야에 일절 관심이 없었으며, 아버지 쉴레이만 1세처럼 다방면에서 능력이 뛰어나지도 못했다. 어쩌면 능력은 뛰어났지만,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셀림 2세는 콘스탄티니예의 궁전에서 술과 여자에 빠져지냈는데, 이 때문에 '주정뱅이 술탄'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그래도 문학적인 부분에서는 확실히 쉴레이만 1세의 재능을 이어받은 것 같은데, 그가 쓴 여러 시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고 한다. 또 자신을 위해 어머니 휘렘이 음모로 처형한 무스타파의 어머니 마히데브란은 무스타파 처형 이후에 지방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셀림 2세는 그녀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그녀가 죽을때가지 그에 걸맞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 성격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가지고 있는 권력에 기대어 안락한 삶을 즐기는데에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그의 생활에는 통치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이 어느정도 잘 운영된데에 따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셀림 2세가 집권한 동안에도 지중해의 패자로서 유럽에 군림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동유럽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을 확립시켰다. 또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로 진출하여 예멘을 정복하는 등 성공적인 정복활동을 벌였다. 지중해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점령하였는데, 이 때문에 1571년 서유럽의 '신성동맹'과 '레판토 해전'을 치루어야했다. 비록 오스만 제국은 이 해전에서 대패하였지만, 금세 해군을 복구하였고, 스페인이 점거하고 있던 튀니지를 점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패배가 가져온 영향은 작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을 흔드는 잔물결 중 하나가 되었다. 또 셀림 2세가 집권하는 동안 흑해 인근에서 앞으로 오스만 제국의 숙적이 되는 러시아와 충돌하기도 하였다. 셀림 2세는 국정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쉴레이만 1세의 집권기부터 계속이어져 온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는 계속이어졌는데, 이는 대재상인 소콜루 메흐메트의 영향도 컸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 또한 쉴레이만 1세 통치기 때부터 계속해서 여러 모스크를 건축하는 등 셀림 2세 때도 이어서 계속 활약하였다. 1574년 셀림 2세는 술에 취한 채로 목욕을 하러갔다가 넘어져서 사망하였다. 만약 셀림 2세가 근래의 사람이었다면 다윈상을 수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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