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네번째 군주 「아흐메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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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형제 살해를 방지하기 위한 개혁

'아흐메트 1세'는 1590년 '메흐메트 3세'의 아들로 '마니사'에서 태어났다. 1603년에 메흐메트 3세가 사망하자, '사피예 술탄'의 주도로 13세였던 아흐메트 1세가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였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계승한 관한 법률이 대대적으로 개혁되었는데, 술탄의 모든 남자형제를 살해해야 된다는 기존의 내용이 없어지고, 대신 황궁 내의 하렘 한쪽 구석에 만들어진 '카페스'(Kafes)라는 공간에 유폐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권력의 계승은 술탄의 가장 능력있는 자식이 잇도록 하였으며, 술탄이 전쟁이나 병으로 사망하게 되면, 카페스에서 지내던 후계자들 중 한명이 권력을 계승하였다. 이러한 변혁에 대해서는 갑작스러운 술탄의 죽음으로 인한 권력의 공백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라던가, 술탄의 세대교체 시기마다 일어나는 내전으로 인한 국력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등의 여러 해석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메흐메트 3세의 즉위떄에 일어난 19명이나 되는 형제를 살해한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대안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인해 변경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제도에서 오는 여러 부작용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는 하였지만, 대신 새로운 부작용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오랜 카페스 생활을 한 후계자들은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해 세상물정을 모르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으며, 일부는 정신적인 부분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은 아흐메트 1세가 집권하기 전부터 서쪽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심으로하는 서유럽 세력과, 동쪽에서는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와 계속 전쟁 중이었다. 먼저 오스만 제국의 서쪽 국경지대인 헝가리 지역을 중심으로 1593년부터 일어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충돌은 장장 13년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1596년 '케레츠테스 전투' 이후 서로 승패를 결정지을 만한 큰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국지적으로 요새 쟁탈전을 치루는 정도로 진행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전쟁의 지속을 바라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합스부르크 가문도 '에르데이 공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양자는 종전을 합의하게 되었다. 1606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 이루어진 '지트바토로크 조약'에서 양국은 종전을 결정지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헝가리의 왕위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고, 오스만 제국에서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루돌프 2세'를 '파디샤'로 칭함으로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였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의 서쪽 국경이 확정되었고, 헝가리 지역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조약에서 술탄이 직접 국경까지 행차하여 조인을 해야 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배상금을 얻어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전보다 영토가 조금 더 늘어나기도 하였기 때문에 무승부로 봐도 좋을 것이다. 대신 오스만 제국의 영토 내에서 프랑스와 배네치아, 네덜란드 등의 상업적 특권을 확대해 줄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후에 오스만 제국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동쪽에서는 1602년부터 페르시아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1612년에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지역에 대한 페르시아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매년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1615년에 페르시아에서 조공을 거부하면서, 다시 한번 전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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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과 최후

아흐메트 1세는 즉위 후 얼마되지 않아 일어난 이복형제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음모를 꾸미거나 뇌물을 받는 부패한 관료들을 추방했는데, 이 과정에서 몇몇 재상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그외에도 토지행정을 개혁하는 등 조금씩 기울어져가는 오스만 제국을 되돌리기 위한 노력들도 있었던 것 같다. 아흐메트 1세는 펜싱과 시짓기, 승마 등을 즐겼는데, 이에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흐메트 1세는 상당히 독실한 무슬림이었기도 했는데, 국민들에게 이슬람의 법과 관습에 맞는 생활을 할 것을 명령하였고, 무슬림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신하들에게 적당한 수준의 구호금을 내도록 하였고, 본인도 메카나 메디나 등의 성도에 많은 기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는 오스만 고전 건축 최후의 걸작이라고 평가 받으며,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 율법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화가들을 매우 싫어하여, 그들을 궁전에서 쫒아내었으며, 콘스탄티니예의 화가 길드를 해산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메흐메트 3세 때 보내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보낸 오르간을 이교도의 부정한 물건이라고 직접 부수어버리기도 하였다. 1617년 아흐메트 1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는데, 병명은 발진티푸스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카페스에서 생활하던 동생인 '무스타파 1세'가 술탄으로 즉위하였는데, 무스타파 1세는 오랜 카페스 생활동안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에, 정신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듬해인 1618년 퇴위하였고, '오스만 2세'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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