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열번째 군주 「쉴레이만 1세」
- 역사
- 2023. 6. 12.
오스만 제국의 후계자
'쉴레이만 1세'는 1494년 '트라페준타'에서 '셀림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7세 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1세에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웠고, 15세에는 '마니사'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쉴레이만 1세의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형제들은 어린시절에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차기 술탄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7세에는 콘스탄티니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에게 해의 '사루칸' 총독으로 임명되는 등 통치 경험을 쌓았는데, 이때 '카눈나메'라는 오스만 세속 법전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쉴레이만 1세는 셀림 1세가 외국으로 원정을 나가면, 대리인으로 아버지가 부재중인 오스만 제국을 관리하였으며, 1520년 셀림 1세가 사망하자 26살의 젊은 나이로, 별다른 저항없이 오스만 제국의 일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즉위가 완전히 평화로웠던 것은 아닌데, 쉴레이만이 집권한지 얼마 안되어 시리아의 총독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진압되었다. 이 반란은 동방에서 오스만 제국의 경쟁상대였던, 당시 페르시아를 장악하고 있던 '사파비 왕조'의 공작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숙원 사업의 정리
쉴레이만 1세는 정복왕 '메흐메트 2세'나 아버지 '셀림 1세'처럼 정복을 통해 제국의 영역을 넓히는데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즉위하고나서부터 꾸준히 오스만군을 정비한 그는 1521년 서유럽을 향해 출정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 왕국의 '베오그라드'에서 패배를 겪고 서유럽 정복을 포기하였지만, 쉴레이만 1세는 한달만에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키고, 베오그라드의 성당에서 금요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셀림 1세가 공략을 준비중이었던 '구호기사단'이 점거하고 있던 로도스 섬으로 쳐들어갔는데, 격렬한 저항을 받았지만 반년에 걸쳐 함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522년 이로서 오스만 제국은 앞바다에서 해적질을 반복하며, 오스만 제국의 해상 교역을 방해하던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고, 본격적으로 지중해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쫒겨난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영지를 찾아 헤메는 신세가 되었는데, 153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아량으로 몰타 섬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1523년에는 유명한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가 대재상에 임명되어 쉴레이만 1세를 보좌하였다.
유럽 침공
골칫거리였던 문제들을 정리한 쉴레이만 1세는 본격적으로 서유럽을 향했는데, 1526년 오스만군을 이끌고 헝가리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에 맞섰으나, '모하치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며, 본인도 후퇴하는 도중에 다뉴브 강에 빠져 익사하였다. 이로서 헝가리 왕국은 멸망하게 되었으나, 좀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러요시 2세는 생전에, 자신의 아내의 오빠이자, 누나의 남편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에게 헝가리 왕국의 왕위를 넘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해 놓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 카를 5세의 동생이었는데, 그의 왕위 계승을 놓고 헝가리의 귀족들의 의견이 서로 갈리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디난트 1세의 제위 반대파는 '에르데이' 지역의 유력한 귀족이었던 '서포여이 야노시'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부더'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고있던 페르디난트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와 서포여이를 내쫒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였는데, 서포여이가 다시 쉴레이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졸지에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529년 쉴레이만 1세는 대군을 모아 오스트리아의 빈을 목표로 원정을 시작하였고, 이에 카를 5세도 스페인 등지에서 군대를 모아 빈을 수비하게 하였다. 하지만 기상 악화나 전염병 등 오스만군의 원정은 순조롭지 못하였고, 몇번의 공세도 번번히 실패하면서, 쉴레이만 1세는 원정을 포기하고 회군하여, '제1차 빈 공방전'은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1530년 카를 5세는 반격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1532년 쉴레이만 1세는 적의 적인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와 '커피출레이션'(Capitulation)을 맺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빈을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카를 5세는 8만 대군을 모아 스스로 빈을 방어하였고, 다시 한번 안좋은 상황들이 겹치면서, 쉴레이만 1세는 결국 빈을 포기하고 회군하였다. 1533년 결국 무력으로 헝가리를 완전히 손에 넣는 것을 포기한 쉴레이만 1세는 함스부르크 왕가와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페르디난트 1세가 서포여이를 헝가리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서로 점유하고 있는 영토의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고, 끊임없이 남은 헝가리 영토를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1539년 서포여이가 사망하고,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이 '야노시 2세'가 되었다. 이에 헝가리 지역의 위기를 느낀 쉴레이만 1세는 즉시 개입하여, 헝가리 중부 지방을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의 영역으로 하고, 본래 영지였던 에르데이를 포함한 동부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보호아래 야노시 2세가 통치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페르디난트 1세는 1541년과 1544년에 두차례에 걸쳐 침공하였지만, 오스만군에 의해 패퇴하였다. 결국 1547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평화협상을 진행하였는데, 이 협정에서 쉴레이만 1세는 로마 황제로서,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와 독일왕인 페르디난트 1세와 협정을 맺었다고 한다. 이후에 한번 동부 지역을 빼앗기기도 하였지만, 다시 되찾아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성립되기 전까지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세력권 안에 속하게 되었다.
지중해 장악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만 제국의 경쟁 관계는 육지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지중해에서도 넓히려고 노력하였는데, 특히 에게 해의 섬들을 둘러싸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1535년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오스만군과 합스부르크의 원정군이 맞붙었는데,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튀니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은 상당히 약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은 주로 해적들을 영입하여 충당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여러 해적들에 접근하여 여러 지원을 해주고, 대신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는 국가들의 선박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며, 필요할때 동원하여 해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는 '바르바로사'로 유명한 '하이레딘' 파샤가 오스만 제국에 합류하였는데, 그의 활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1537년 하이레딘 파샤가 지휘한 오스만 해군은 베네치아 공화국령 섬이었던 낙소스, 파로스, 티노스 등 8개의 섬을 점령하여, 낙소스 공국을 멸망시켰다. 또 남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해안을 유린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을 괴롭히기도 하였다. 1538년에 교황 '바오로 3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십자군을 결성시켰는데,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몰타의 구호기사단이 '신성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신성동맹의 함대는 '프레베자 해전'에서 하이레딘 파샤의 오스만 함대에 대패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의 패권을 손에 넣었으며, 여세를 몰아 북아프리카의 알제리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동방 원정
쉴레이만 1세는 주로 유럽의 세력과 경쟁하였지만, 동방의 적들도 잊지 않았다. 오스만군은 지속적으로 페르시아를 공격하였고, 사파비 왕조를 몰아내고 바그다드와 예멘, 아덴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는데에는 실패하였고, 1555년 평화협정을 맺음으로 동방의 국경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활동영역은 동쪽으로도 크게 성장하여, 한때 포르투갈 왕국과 경쟁하기 위해 인도의 한 지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법전 편찬과 문화 융성
쉴레이만 1세는 외부로 오스만 제국을 확장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내부를 다지는 대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법률 분야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 같은데, 그는 법률에 의한 공평한 계약과 사유재산 보호 등에 관심을 가져 저명한 법학가들에게 법률을 조정하고 제정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쉴레이만 1세는 '군하총회'를 편찬하여 제국을 안정시키고, '쉴레이만 법전'과 '이집트 법전'을 편찬하여 세세한 부분까지 법으로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여, 술탄이 오랜기간 해외 원정을 시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쉴레이만 1세 스스로도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여 많은 시를 지었으며, 전쟁 도중에도 꼼꼼히 일기를 써서, 후에 '전쟁일록'이라는 책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소문을 듣고 여러 예술가들이 유럽에서도 찾아왔으며, 그외에도 많은 모스크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후계자와 최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전통적으로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하렘에서 아이를 얻어 후계자 경쟁을 통해 가장 뛰어난 아이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하렘의 후궁들 중에 '록셀라나'(휘렘 술탄)를 총애하였고, 그 동안의 전통을 깨고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하여 황후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는 오스만 제국에는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켰는데, 바로 황후가 권력을 가지고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차기 술탄으로 만들기 위해 이브라힘 파샤를 숙청하는 등 개입하였고, 그 때문에 후계자들 간의 경쟁이 아닌 쉴레이만 1세의 손에 의해 두명의 후계자 후보가 처형되어 탈락하기도 하였다. 결국 후계자는 쉴레이만 1세와 황후의 손에 의해 사실상 '셀림 2세'로 결정되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몰락으로 연결되게 된다. 또 쉴레이만 1세는 '데브시르메'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관료들을 중용하였는데, 너무 이들을 편애한 나머지 집권하는 동안 전통적인 튀르크계 귀족들의 세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결국 관료들과 예니체리들의 권력이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술탄의 통치에 대한 개입도 점점 심해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565년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함대를 몰타로 파견하였지만, 구호기사단의 저항으로 패배하여 물러나게되었다. 1566년에는 72세의 고령으로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시 헝가리로 출정하였다. 오스만군은 '시게트바르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쉴레이만 1세는 요새가 함락되기 하루 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만들어내어, 쉴레이만 대제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다시 오스만 제국에는 그를 능가하는 명군이 등장하지 않았고, 이 때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