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의 후견인 「하야시 히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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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오다가의 가신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는 1514년경 '오와리국'의 토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히데사다는 오랫동안 '미치카츠'(通勝)로 알려져있었는데 여러 연구 결과 히데사다로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사다는 아버지 '하야시 미치야스'와 함께 '오다 노부히데'의 휘하로 들어갔고, 거기서 정치나 외교 부분에 수완을 발위하여 중신이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자 그 후견인으로써 가로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546년에는 '후루와타리 성'에서 노부나가의 성인식 때 시중을 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노부나가가 노부히데의 장례식 때 벌인 일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다. 1554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 인군의 '미카와국'으로 진군하자, 노부나가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하였는데, 이때 히데사다는 노부나가의 출진요청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1555년에 노부나가가 '키요스 성'을 차지하였을때, 부재중의 '나고야 성'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1556년 노부나가의 장인이자, 그를 지지해주던 '사이토 도산'이 사망하였는데, 이를 호기로 여긴 히데사다는 '시바타 카츠이에' 등과 함께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벌어진 '이노우 전투'에서 패배하여 '스에모리 성'에 농성하였고, 노부나가의 어머니인 '도타 고젠'의 중재로 용서받아 목숨을 구하였다.

노부나가의 중신

히데사다는 한번 배신했던 몸이었지만, 복귀한 후에도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었는데, 특히 행정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 같다. 노부나가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정치적 문서에는 항상 그의 서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기 위하여 교토로 상경할때 작성한 기청문에도 히데사다가 첫번째로 서명하고 있다고 한다. 또 조정과의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던 '야마시나 토키츠구'와 만날때도 노부나가의 전달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투에도 여러번 참여하였는데, 1560년에 '오케하자마 전투'에도 참여하였으며, 1574년에는 '이세나가시마 잇코잇키'를 섬멸하는 과정에서 배를 조달하는 등 후방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1578년에는 '하리마국' 공략전과 '칸키 성' 공략전에도 차전하였다고 한다.

배신의 결말

그러나 히데사다는 1580년 24년전에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노부유키를 옹립한 건을 이유로 추방당했다. 이런 뜬금없는 처벌에 대해서 의아한 부분이 많지만, 처벌을 행한 노부나가의 속내는 알 수 없다. 이미 고령이었던 히데사다는 추방된 후 2개월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히데사다를 추방한 노부나가도 2년후에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였다. 히데사다가 추방 당할때 아들 '하야시 카즈요시'도 같이 추방당했는데,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오다가의 혼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고, 이후 카즈요시의 가문은 대대로 '토사번'에서 가로를 역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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