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아홉번째 군주 「셀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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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냉혹한 후계자 경쟁

'셀림 1세'는 1470년경 아마시아에서 바예지드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예지드 2세의 후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전통에 따라 지방 총독으로 보내졌는데, 장남인 '아흐메트'는 아마시아 총독으로 부임하였고, 그 다음 '호르후드'는 안탈리아로 보내졌으며, 셀림 1세는 '트라페준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는 부왕이 서거 하였을때 콘스탄티니예에 가장 먼저 입성한 자식이 권력을 승계하였던 오스만 제국의 법상으로 보았을때, 당시 바예지드 2세가 어느 아들을 차기 술탄으로 생각했을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니예와 임지의 사이의 거리로 보았을때 사실상 승계구도에서 밀려나있던 셀림 1세는 이를 뒤집기위해 노력하였다. 1511년 셀림 1세는 흑해 북쪽의 '크림 칸국'의 협력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여,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영지를 '루멜리아' 지역으로 옮겨줄 것을 바예지드 2세에게 요구하였다. 바예지드 2세는 이러한 셀림 1세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하였지만, 대신 북쪽 끝 변방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 지역에서는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 제국'을 건국하였는데, 사파비 제국은 '시아파'로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과는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온건한 정책을 폈던 바예지드 2세는 사파비 제국과의 충돌을 피하고 있었고, 아흐메트도 이러한 바예지드 2세의 정책을 따랐기 때문에 바예지드 2세와 대재상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대로 셀림 1세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였는데, 독단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성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예니체리나 시파히 같은 군부세력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 사파비 제국의 획책에 의해 오스만 제국 동부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바예지드 2세는 아흐메트에게 공훈을 주기 위해, 그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흐메트는 반란의 진압에는 성공하였지만, 그의 안일한 지휘로 인해 재상 알리 파샤가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예니체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지지받지 못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셀림 1세는 새로운 부임지로 향하는 도중 콘스탄티니예 근처에 자리를 잡고 농성하였으며, 이에 바예지드 2세가 군대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셀림 1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크림 칸국으로 도주하였고, 이 틈을 타고 아흐메트도 콘스탄티니예로 와서 술탄의 자리를 승계하려고 하였는데, 아흐메트는 예니체리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료와 귀족들에 의해 승계가 거부되었다. 실망한 아흐메트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지역의 영지들을 무단으로 점거하면서 사실상 반란이나 다름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1512년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 혼란이 계속되자, 셀림 1세는 크림 칸국에서 군대를 빌려 다시 돌아왔고, 콘스탄티니예를 점거하여 사실상 술탄직을 찬탈하였다. 1513년에는 아흐메트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그를 처형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명실공히 오스만 제국의 권력을 손에 넣은 셀림 1세는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였고, 바예지드 2세는 은퇴시켜 별궁으로 보내 사실상 유폐시켰는데, 바예지드 2세는 이동하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바예지드 2세의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셀림 1세가 독살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셀림 1세는 '냉혹한(Yavuz)' 술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비정한 권력 쟁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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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 정벌

술탄이 된 셀림 1세는 기존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주로 서유럽쪽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동방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아마 자신과 오스만 제국을 계속 괴롭힌 사파비 제국에 대한 원한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은데, 이러한 원인에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교적 갈등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1514년 양국은 무역을 전면 중단하였으며,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셀림 1세는 직접 오스만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셀림 1세는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의 사파비군을 패배시키고, 수도인 '타브리즈'까지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이상의 원정은 어려웠기 때문에 완전한 결말을 내지 못하고 군대를 물리게 되었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충돌은 후세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지만, 이 전투로 셀림 1세는 동부 아나톨리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었다. 또 1516년에 북아프리카의 알제를 근거지로 한 해적 집단을 신하로 삼았는데, 오스만 제국은 주로 해적들을 해군력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상당한 해군력이 증강되었다.

맘루크 왕조의 멸망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지배 지역이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변방국가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맘루크 술탄국'이 가장 권위가 있었는데, 맘루크는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영향권 안에 두고 있었으며, '아바스 왕조'의 정통성있는 칼리프인 '알 무타와킬 3세'도 맘루크 술탄의 보호아래 있었다. 또 몽골군과 십자군을 격퇴하였으며, 시리아와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러한 맘루크 술탄국은 무섭게 성장하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사파비 제국에 협조하였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15년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을 완전히 석권함으로서 맘루크 술탄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1516년 맘루크의 술탄 '알 아슈라프 깐수 알 구리'는 사파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눈치챈 셀림 1세도 오스만군을 이끌고 출정하였고, 이후 벌어진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대승을 거두었으며, 술탄 깐수 알 구리는 전사하였다. 사파비 제국과의 찰디란 전투도, 맘루크와의 마르즈 다비크 전투도,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하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과 화포를 적극적으로 운용한데에 반해, 적들은 전통적인 기병과 보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두 전투에서 전쟁이 전통적인 냉병기 위주에서 근대식 화약무기로 옮겨가는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다. 전투에서 승리한 셀림 1세는 단번에 시리아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다. 셀림 1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집트까지 쳐들어갔고, 1517년 '리다니야 전투'에서 승리하여 맘루크의 수도 카이로를 접수하면서 맘루크 술탄국은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의 패자가 되었고, 알 무타와킬 3세가 자신의 칼리프 칭호를 셀림 1세에게 양도함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정식으로 칼리프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 메카와 메디나를 영향권 안에 두어 무슬림의 성지 순례길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예루살렘도 오스만 제국의 영역 안에 있었다.

업적과 최후

셀림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두배 넘게 확장시켰으며, 정식으로 칼리프가 되어, 명실공히 이슬람 세계의 패자가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오스만 제국에서 무슬림이 기독교인보다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러나 셀림 1세는 계속해서 이교에 대한 관용정책을 유지하였으며, 교회에 여러 혜택들을 주기도 하였다. 오히려 셀림 1세는 이교보다 오스만 제국에서 이단이었던 시아파를 더 싫어했다고 한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치 대 제국으로 만들었지만, 통치 9년 만에 사망하였다. 1520년 동방을 제압한 셀림 1세는 서유럽으로 눈을 돌려, '구호기사단'이 점거하고 있던 로도스 섬으로 원정을 준비하였는데,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염병에 걸려 병사했다고 한다. 셀림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쉴레이만 1세'가 계승하였는데, 쉴레이만 1세를 제외하고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역사상 유일하게 아무런 분쟁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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