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여덟번째 군주 「바예지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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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후계자 쟁탈전

'바예지드 2세'는 1447년 '메흐메트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후계자들이 지방 도시의 총독으로 내려가서 실무 경험을 쌓고, 자신만의 세력을 모아 술탄의 사후에 형제들 사이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처럼 계속되었는데, 메흐메트 2세는 이러한 후계자들의 경쟁 행위를 아예 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바예지드 2세도 어린 시절 '아마시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하였는데, 당시 대재상이었던 '카라만르 메흐메트'는 '콘야'의 총독이었던 '젬'이 권력을 승계할 것으로 기대하여, 그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바예지드 2세를 지지하고 있던 예니체리들이 폭동을 일으켜 카라만르 메흐메트를 살해하였고, 바예지드 2세는 전갈을 받고 급히 콘스탄티니예로 향하여, 바예지드 2세가 권력을 승계하게 된다. 이에 젬은 부르사 인근에서 바예지드 2세가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스스로 술탄을 칭하였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였던 젬은 바예지드 2세에게 '루멜리아'와 아나톨리아로 나누어 통치할 것을 제안했지만, 바예지드 2세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1482년 전투에서 패한 젬은 '구호기사단'이 점거하고 있던 로도스 섬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문에 국외에 계속 권력의 경쟁자를 두게 된 바예지드 2세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으며, 젬이 교황청으로 인도되자, 그를 계속 잡아두는 조건으로 매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은 젬을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을 무너트릴 십자군을 보내려고 하였지만, 젬이 끝까지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495년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에게 몸값은 계속 교황이 받는 조건으로 인도되었는데, 샤를 8세의 원정에 동행하였다가 나폴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러한 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교황이 개입됬다고도 하며, 그의 사망에 대해서도 교황청에서 개입하여 은폐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바예지드 2세는 젬의 생사에 대해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의로운 바예지드

정복왕인 아버지 메흐메트 2세와는 대조적으로 바예지드 2세는 정복사업보다는 내치에 집중하였다. 이것은 바예지드 2세의 성향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았는데, 먼저 메흐메트 2세의 통치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영토를 얻었지만, 대신 잦은 전쟁으로 인해 비어버린 국고와 주의를 기울여 관리해야할 넓은 정복지를 가져왔다. 또 헝가리에는 현군이라고 불리우는 '마차시 1세'와 '검은 군대'가 버티고 있었고, 페르시아 지역에서는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가 버티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혀 전쟁을 치루지 않은 것은 아닌데, 바예지드 2세는 주로 베네치아와 경쟁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흑해와 에게해 일대에서 종주권을 공공히하는데 주력하다. 동방지역에서는 '카라만 공국'을 완전히 멸망시켜 아나톨리아 지역을 평정하였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한 견제를 계속하였다. 바예지드 2세는 메흐메트 2세와 문화적 취향도 상당히 달랐는데, 바예지드 2세는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으로 메흐메트 2세가 즐겼던 유럽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바예지드 2세는 모스크나 대학, 병원, 교량 등 공공건축물들을 건설하는데 많은 역량을 투자하였으며, 철학과 법학, 문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메흐메트 2세 통치시절에 몰수되었던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나 종교재산들을 돌려주었다. 특히 그는 자선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바예지드 2세를 사람들은 '정의로운 바예지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바예지드 2세는 여타 다른 종교들에게도 관대한 태도를 유지하였는데, 한때 스페인에서 '레콩키스타'로 인해 쫒겨난 '스파라드 유대인'(스파라딤)들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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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후계자 쟁탈전

1509년 콘스탄티니예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바예지드 2세의 권력이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바예지드 2세의 아들들은 아버지인 술탄이 아직 생존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시작하였다. 본래 후계자로 유력했던 인물은 장남인 '아흐메트'였는데, 그는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의 사주로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에 대해 일어난 '샤 쿨루의 반란'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흐메트는 반란을 진압하는 것 보단 자신의 세력을 온존시키는 것에 더 집중하였고, 결국 반란 진압 과정에서 재상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관료들에게 지지받지 못하였다. 한편 '셀림 2세'는 후계구도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바예지드 2세에게 자신의 총독 임지를 루멜리아로 옮겨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이런 의도를 눈치채고 있던 바예지드 2세는 아예 북쪽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그러자 셀림 1세는 임지로 향하는 도중에 콘스탄티니예 인근에 멈추어 자리를 잡아버렸고, 이에 바예지드 2세가 군대를 보내어 제압하였다. 셀림 1세는 도주하여 한때 아내의 친정인 '크림 칸국'으로 몸을 피하였다가, 이후 장인에게 군대를 빌려서 귀환하였고, 예니체리와 관료들의 협력을 받아 반강제로 바예지드 2세를 퇴위시키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바예지드 2세는 퇴위 후에 별궁이 있는 '디메토카'로 보내졌는데, 이동하는 도중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실의에 빠져서 사망했다고 하지만, 셀림 1세가 독살했다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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