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왕실의 외척 '왕망'(王莽)은 기주 위군 원성현 사람으로 기원전 45년경 중국의 '전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전건'의 손자인 제북왕 '전안'의 후예라고 하는데, 제나라 사람들이 이 집안을 문자 그대로 '왕가'라고 불렀기 때문에, 후에 성을 전씨에서 왕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왕씨 집안의 '왕금'은 젊은 시절에 법률을 공부하여,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일종의 법원 공무원인 '정위사'를 지냈는데, '선제' 때 딸 '왕정군'이 태자 '유석'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다. 그런데 왕정군이 입궁한지 얼마안되어 황손을 회임하였고, 유석이 그때까지 다른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선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후 기원전 48년 선제 사후에 유석이 즉위하여 '원제'가 되었고, 왕정군은 황..
화북을 평정한 전진 357년 '저족' 출신의 '부견'은 '수광정변'을 일으켜 '전진'의 3대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한족 출신의 '왕맹'을 중용하여 내치에 신경쓰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후 크게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원 정복을 시작하였는데, 370년에 전연의 수도 '업'을 함락시켜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같은 저족 국가인 '구지'를 멸망시키고, 373년에는 구지 땅으로 쳐들어온 '동진'이 군대를 패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쳐들어가서 양주와 익주를 얻어 서촉 지역을 함락시켰다. 376년에는 서쪽의 '전량'과 북쪽의 '대나라' 멸망시켜, 전진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최초로 하북지역을 평정하였으며, 천하통일까지 오직 남쪽의 동진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동진은 본래 후한말..
독립전쟁 참전용사 '제임스 먼로'는 1758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의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패트릭 앤드류 먼로'가 스코틀랜드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는데, 아버지인 '스펜스 먼로'는 어느 정도 규모있는 농장의 농장주이자 목수이기도 했다. 먼로는 11세부터 학교에 다녔는데, 농장일을 도와야했기 때문에 1년에 11주만 등교하였다고 한다. 1772년에는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 2년 뒤인 1774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가장이 된 먼로는 16세에 학업을 그만두고 농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먼로는 영국의 '참을 수 없는 법'에 대한 반발로 버지니아 식민지의 총독 관저를 습격하는 등 영국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
고구려와의 악연 '양광'은 569년 '북주'의 '수국공' '양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서위'의 실력자였던 '독고신'의 딸 '독고가라'로, 그녀는 금욕적이었으나 질투심이 많은 성격으로 유명하며, 남편이자 황제인 양견에게 정치적 조언이나 간섭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양견도 그녀의 말을 쉬이 거스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581년 아버지 양견이 북주의 황제 '우문천'으로부터 재위를 선양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고, 12세의 양광은 황족이 되어 '진왕'으로 봉해졌다. 양견은 그 능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그는 중원을 통일하여 '위진남북조시대'를 종결시켰으며, '개황성세'라고 불리우는 태평성대를 열어 칭송받았다. 양광은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것 같은데,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589년 양견의 명으로 '남..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 '제임스 매디슨'은 1751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의 '포트콘웨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름도 '제임스 매디슨'인데, 그는 100여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주로 담배를 재배하는 5,0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 일대에거 가장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엘레노어 로즈 콘웨이 매디슨'도 주로 담배를 제배하는 저명한 농장주의 딸로, 매디슨은 이러한 부모 아래에서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 것 같다. 11세부터 공부를 시작한 매디슨은 언어, 수학, 지리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라틴어에 능숙했다고 하며, 1769년에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일반적인 버지니아 출신자들과 달리 '윌리엄 & 메리 대학'이 아닌 '뉴저지 대학'(프린스턴 대학)에 다녔다고 한다. 177..
황제의 양자 '시영'(柴栄)은 921년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이미 오대십국시대에 들어선 시기로 '후량' 말기에 해당하였다. 시영의 아버지는 '시수례'인데, 그의 누이 '시씨'가 '곽위'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시영은 어렸을때부터 고모부인 곽위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곽위의 아버지 '곽간'은 본래 주자사를 맡을 정도로 고위 관리였지만, 곽위가 어렸을때 전사하여 이후로 곽위의 집안은 몰락했었다. 그러나 곽위는 18세에 군에 입대하여 용맹한 모습을 보였고, 후량과 '후당'을 전전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는데, '유지원'의 총애를 받아 그의 휘하에서 '시위친군도우후'가 되었다. 유지원은 '후진'의 절도사로 있었는데, 요나라 군대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돌아가자, 947년 세력을 이끌고 '개봉'에 입성하여 '..
오스만 제국의 상비군 '예니체리'는 1364년 오스만 제국이 세번째 군주였던 '무라트 1세'가 처음 창설하였다. 이는 술탄의 개인 노예인 '카프쿨루'(Kapıkulu Ocağı)에서 시작한 것으로 초기에는 전쟁포로들이나, 술탄이 개인적으로 사들인 노예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술탄의 직속 부대는 기병대로 구성된 '카프쿨루 스파히'와 보병 중심의 '예니체리'로 구성되었다. 예니체리의 어원은 튀르크어의 '예니센'으로 '새로운 병사'라는 뜻인데, 이는 술탄이 노예들을 중심으로한 직속 부대를 창설한 이유와 관련이 있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1세'를 중심으로 많은 튀르크계 유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였기 때문에, 건국에 힘을 보탠 튀르크계 이슬람 학자나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군사적으로도 필요..
일확천금을 꿈꾸는 빈농 '주전충'(朱全忠)의 본래 이름은 '주온'으로 852년 당나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때 셋째라는 뜻으로 '주삼'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는데,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일가족이 먼 친척뻘인 부호 '유승'의 밑에서 소작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전충은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학문이나 무예를 익히는 것에 흥미를 두었는데, 이 때문에 게으르다고 유승에게 욕을 먹기 일수였다. 이 시기는 '당나라' 말기로 지역의 재정과 군권은 각지의 '절도사'들이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등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당나라의 조정이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금 덕분인데, 당나라는 소금을 정부가 독점적으로..
철저한 실력주의자가 찾아낸 인재 '왕맹'(王猛)은 325년경 중국의 청주 북해국 극현에서 태어났다. 왕맹의 집안은 본래 중국 전국시대 때 '제나라'의 전씨 왕가 출신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당시 왕맹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삼태기를 엮어서 파는 것으로 생활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왕맹은 비록 가난했지만 외모와 자태가 빼어나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는데, 다른 이들이 청담이나 즐기던 것에 반해, 그는 병서를 애독하며 실질적인 학문에 관심을 두었다. 또 왕맹은 기개가 높고 도량이 있어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는 대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얕보는 선비들을 온전히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맹은 학문을 익히기 위해 '화음산'에 들어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였는데, 354년에 '동진'의 대장군이었던 '환온'..
손꼽히는 수재 '토마스 제퍼슨'은 1743년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인 '피터 제퍼슨'은 '알버마를 카운티'의 대농장주이자 측량기사 였으며, 어머니 '제인 랜돌프'도 농장주의 딸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던 것 같다. 1752년 제퍼슨은 9살때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 같은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4세인 1757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제퍼슨은 이때 약 5,000에이커의 땅과 삼십명 가량이 노예를 상속받았다. 제퍼슨은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학교에 다녔는데, 고전과 역사, 과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1760년에는 16세의 나이로 '윌리엄 & 메리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2년 후인 1762..
출생과 관련된 소문 '원굉'(元宏)은 467년에 태어났는데, 본래 이름은 '탁발굉'으로 아버지는 '북위'의 황제 '헌문제' '탁발홍'이다. 원굉의 어머니 이씨는 369년에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이는 당시 북위에 외척을 경계하기 위해 황태자로 책봉될 경우 생모를 숙청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471년에는 5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였는데, 양위 후 헌문제는 스스로 태상황제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태후였던 문성문명황후 풍씨에 의한 것이었는데, 풍태후는 헌문제의 계모로 이미 헌문제의 통치시기부터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고, 헌문제가 성장하여 권력을 놓고 대립하게 되자 폐위되었다. 헌문제는 이후 476년에 22세의 나이로 풍태후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풍태후는 원굉이 어린 것을 이유로 계속해..
헝가리를 둘러싼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쟁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가 언제인가 하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혹자는 '쉴레이만 1세' 시기를 최전성기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혹자는 쉴레이만 1세 때부터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혹자는 '메흐메트 4세' 시기에 오스만 제국의 최대 판도를 실현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최전성기로 보기도 하지만, 혹자는 '쾨프륄뤼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의 통치시기와 메흐메트 4세의 집권시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오스만 제국의 서쪽 끝으로 원정을 떠난 점에 있을 것이다. 쉴레이만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침공에 대한 헝가리의 '서포여이 야노시'의 구원 요청을 명분으로 출정하였고, 그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