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삼군팔준 '유표'(劉表)는 중국의 후한말인 142년경 태어났는데,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으로, 자는 '경승'(景升) 또는, '경숙'(景叔)을 썼다고 한다. 유표는 한나라 황실의 종친으로 '경제'의 사남 노공왕 '유여'의 아들 욱랑후 '유교'의 자손이며, 명망 높은 유학자로 젊었을 때부터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명세가 꼭 좋게만 작용하지는 않았는데, 당시에는 사대부 출신의 관료들과 환관 세력이 권력을 가지고 대립하던 시기였고, 166년에 환관들에 의해 '당고의 화'(당고의 금)로 불리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벼슬길이 끊기게 되었다. 당시에 이 사건에 연루되어 피해를 입은 이들을 가리켜 '후한삼군팔준'이라고 부르며 칭송하였는데, 유표는 그중에 '팔급'에 해당한다. 이후 유표는 '황건적의 난'이..
마틸다 황후 '마틸다'는 1102년경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의 딸로 태어났다. 1108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가 헨리 1세에게 마틸다와 결혼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20대 중반인 하인리히 5세가 6세의 마틸다에게 청혼한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철저한 정략결혼으로 헨리 1세는 딸을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는 것과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든든한 동맹을 얻을 수 있었고, 하인리히 5세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지참금을 받아 이후 로마 원정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마틸다는 1110년 잉글랜드를 떠나 신성 로마 제국으로 향했으며, 리에주에서 만나 정식으로 약혼하였고, 마틸다는 8세의 나이로 독일의 왕비가 되었다. 이후 하인리히 5세는 로마 원정을 성..
초나라와 원수지다 '오자서'(伍子胥)의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오운'(伍員)이지만, 자를 '자서'로 써서 흔히 오자서로 불린다. 오자서의 가문은 대대로 초나라에서 벼슬을 한 명문으로 초의 장왕을 모신 명장 '오삼'이나, 초의 영왕을 보조한 '오거' 등이 유명하고, 아버지인 '오사'는 당시 태자인 '웅건'의 스승인 태부로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초나라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527년에 초나라를 다스리던 평왕은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진나라의 힘을 빌리기 위해 태자와 진나라의 공주를 혼인시키기로 하였고, 자신의 측근으로 오사 밑에 소부로 있던 '비무기'(비무극)이란 자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진나라로 간 비무기는 공주가 대단한 미인인 것을 알게되자, 평왕에게..
19세기 태생의 첫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1804년 미국의 뉴햄프셔 주의 힐스보로에서 태어났다. 피어스의 아버지 '벤자민 피어스'는 지역 유력자였는데, 그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전쟁 이후에는 준장으로 지역 민병대의 지휘관으로 있었다. 또 저명한 민주공화당 정치인으로, 뉴햄프셔 주의 하원의원을 역임하고, 두 번이나 뉴햄프셔 주지사를 지냈다. 피어스는 이러한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힐스보로에서 학업을 시작하였고, 12세에는 핸콕에 있는 학교로 옮겼다가, 다시 필립스 엑스터 학교로 옮겨 대학 입학을 준비하였다. 1820년에는 메인 주에 있는 '보딘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초기에는 공부보다 사회운동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성적이 나빴지만, 후에 다시 공부에 집중하여 1824년에는..
극적인 신분의 변화 '유순'(劉詢)은 본래 이름이 '유병이'로 기원전 91년경에 태어났는데, 전한 무제 '유철'의 아들 태자 '유거'의 손자이다. 그는 별일 없이 자랐다면 다음 황제의 손자로 본인이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거나 못해도 왕으로 봉해질 수 있었겠지만, 그가 태어난 해에 벌어진 '무고의 화'로 인해 완전히 다른 운명을 겪게 되었다. 무제의 측근이었던 '강충'은 유거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당시의 흉흉한 상황을 이용해서 유거를 무고하였고, 이 일이 커지면서 유거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유거의 일가는 역모로 처벌되었고, 갓난아이였던 유순만이 감옥을 담당하던 관리인 '병길'의 조치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유순은 감옥에서 두 명의 여죄수의 젓동냥을 받으며 연명하였고, 이후 유거가 무죄였..
명장의 후예 '마초'(馬超)는 176년 중국의 '후한' 말기에 태어났는데, 자는 '맹기'(孟起)를 썼다. 마초의 집안은 후한의 개국공신인 '마원'의 후예로, 아버지 '마등'은 '관중십장'이라고 불리던 지역 유력자 중에 한 명이었다. 마등의 어머니는 '강족'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들과 어울리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후한 말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군에 투신하였고, 이후 그와 관련하여 벼슬을 받아 '정서장군'이 되었으며, 세력을 모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인근에는 '진서장군' '한수'가 있는데, 그도 관중십장 중 한 명으로, 마등과 비슷한 경위를 밟아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마등과는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는 일종의 라이벌과 같은 관계였다. 마등과 한수는 한때 의형제를 맺기도 하였으나, 이내 다시 사이..
영지 없는 귀족 '헨리 1세'는 1068년경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윌리엄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주로 잉글랜드에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내용은 알려진 바 없다. 윌리엄 1세는 1087년에 사망하였는데, 노르망디의 공작위는 장남인 '로베르 커토즈'가 상속받았고, 잉글랜드의 왕위도 형 '윌리엄 2세'가 이어받았기 때문에, 헨리 1세에게는 남은 영지가 없었고, 대신 상당한 금액의 돈을 유산으로 상속받았다. 헨리 1세는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상속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실망했을 것 같은데, 그는 대신 잉글랜드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그가 윌리엄 2세에게 어머니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가난한 어린 시절 '밀러드 필모어'는 1800년 미국의 뉴욕 주 북부에 있는 핑거 레이크 지역에서 태어났다. 필모어 집안은 처음에는 코네티컷 주에 정착했던 것 같은데, 이후 그의 아버지대에 버몬트 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뉴욕 주로 옮겨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뉴욕 주로 이주하면서 구매한 토지의 소유권에 문제가 있어 상실하였고, 그 때문에 필모어의 유년기에 상당히 가난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필모어의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때때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필모어는 이러한 가난 때문에 14세에 군에 입대하려고 하였던 것 같은데, 그의 아버지는 필모어를 설득하여, 뉴욕 주 스파르타에 있던 재단사 밑에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싸움 '유철'(劉徹)은 기원전 156년경 한나라 황제인 '경제'의 10번째, 또는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는 정실부인인 박황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지만, 6명의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한나라의 승계 원칙으로 장자인 '유영'이 후계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유철이 황제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후 박황후가 폐위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는데, 유철의 어머니 '왕지'는 경제의 누나인 '관도공주'와 협력하기로 하였는데, 왕지는 유철과 관도공주의 딸인 '진아교'를 혼인시키기로 하였고, 관도공주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왕지를 새 황후로 책봉되게 하였다. 결국 왕지가 새 황후가 되면서, 유영은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유철이 ..
얼굴이 붉은 왕 '윌리엄 2세'는 1060년경 노르망디의 공작인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의 공작으로 시작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왕이 되었지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 모두를 직접 통치하였다. 그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의 왕 '필리프 1세'는 윌리엄 1세의 장남 '로베르 커토즈'를 부추겨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로베르는 아버지가 이미 잉글랜드의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장 노르망디의 공작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로베르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윌리엄 1세는 자신의 사후에 노르망디의 공작위를 물려줄 것을 약속하여 아들을 회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차남인 '리처드'는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1087년에 윌리엄 1세가 죽자, 윌리엄 2세..
오하아몽 '여몽'(呂蒙)은 178년경 태어났는데, 예주 여남군 부피현 사람으로 자는 '자명'(子明)을 썼다. 여몽은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 매형인 '등당'에게 의지하였는데, 당시 등당은 '손책' 휘하에 있었다. 여몽이 열대여섯 살 무렵 등당은 '산월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는데, 여몽이 몰래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등당이 나중에 이를 발견하고 크게 꾸짖었는데, 그래서 멈추지 않았기에 그 사실을 여몽의 어머니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때 여몽은 어머니에게 가난하고 천하면 살기 어려우니 공을 세워 부귀영화를 누려야 한다며,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등당의 부하는 어린애가 그래봐야 호랑이 먹이가 될 뿐이라고 무시했다고 하는데, 이후 여몽과 ..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 1세'는 1028년경 노르망디 공작인 악마공 '로베르 1세'와 평민인 '에를르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에를르바는 무두장이의 딸로 추정되는데, 아마 공작의 저택에서 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 되었든 윌리엄 1세는 공작과 정식 혼인사이가 아닌 평민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생아왕'이라는 별명으로 계속 고통받기도 했다. 그러나 윌리엄 1세는 로베르 1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는데, 이는 달리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들이 없었던 탓으로, 1035년에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던 로베르 1세가 귀환 도중에 사망하면서, 8세의 나이로 공작위를 계승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로베르 1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그의 부하들에게도 충성서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