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 형제간의 분쟁에서 승리한 「헨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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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영지 없는 귀족

'헨리 1세'는 1068년경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윌리엄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주로 잉글랜드에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내용은 알려진 바 없다. 윌리엄 1세는 1087년에 사망하였는데, 노르망디의 공작위는 장남인 '로베르 커토즈'가 상속받았고, 잉글랜드의 왕위도 형 '윌리엄 2세'가 이어받았기 때문에, 헨리 1세에게는 남은 영지가 없었고, 대신 상당한 금액의 돈을 유산으로 상속받았다. 헨리 1세는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상속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실망했을 것 같은데, 그는 대신 잉글랜드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그가 윌리엄 2세에게 어머니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때, 윌리엄 2세는 동생의 요청을 거부하였는데, 이미 형제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견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헨리 1세는 다시 노르망디로 돌아와 이번에는 로베르에게 영지를 구매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이내 상황이 바뀌었는데 1088년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 걸쳐있는 귀족들이 로베르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로베르도 이에 호응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였는데, 로베르는 잉글랜드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코탕탱반도에 대한 권리를 헨리 1세에게 팔았다. 덕분에 헨리 1세는 코탕탱 백작이 될 수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반란은 미처 로베르가 해협을 건너기도 전에 윌리엄 2세에게 진압되었기 때문에, 로베르는 이 거래를 다시 되돌리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후 헨리 1세는 반란이 끝나 잠잠해진 잉글랜드로 다시 건너가서 윌리엄 2세에게 재차 어머니의 영지에 대해 부탁했지만 거절당했고, 로베르는 이를 기회로 여겨 노르망디로 돌아온 헨리 1세를 구금하고 그의 영지를 강탈하였다. 이듬해인 1089년에 헨리 1세는 노르망디의 대귀족들의 탄원으로 석방될 수 있었지만 영지는 되찾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표면적인 것으로 노르망디 서부에서는 헨리 1세가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하였다. 이 시기부터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윌리엄 2세와 로베르 사이에 공수가 바뀌게 되었는데, 윌리엄 2세는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부추기는 등 공작을 하였고, 1091년에는 본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침략하였다. 그러나 이내 두 형제는 협상을 맺었는데, 그것은 서로가 서로의 영지를 인정하고, 둘 중 한 명이 사망하였을 경우 나머지 한 명이 영지의 권리를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또 두 형제는 동생인 노르망디에서 헨리 1세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에도 합의하고 있다. 형들의 공격을 받은 헨리 1세는 한때 노르망디에서 축출되어 프랑스를 떠돌기도 하였지만, 1092년에 다시 노르망디 서부로 돌아와 조금씩 영지를 잠식하였다. 또 그사이 윌리엄 2세와 로베르의 사이도 다시 벌어져서, 윌리엄 2세는 헨리 1세를 지원하여 로베르를 견제하였다. 헨리 1세는 잉글랜드를 오가며 윌리엄 2세와의 관계를 다졌고,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요청으로 로베르가 '제1차 십자군 원정'에 합류하면서 노르망디를 윌리엄 2세에게 맡겼기 때문에, 형제간의 분쟁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잉글랜드의 왕

1100년 윌리엄 2세는 헨리 1세를 포함한 잉글랜드의 귀족들과 사냥에 나섰는데, 도중에 화살에 맞아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이것이 사고인지, 아니면 암살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헨리 1세를 포함하여 귀족들은 왕이 사망하였는데도 시체를 그곳에 두고 그냥 돌아가버렸다. 헨리 1세는 재빠르게 왕실의 재물을 장악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려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 로베르는 십자군 원정의 도중이었기 때문에 이 건에 대해 간섭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헨리 1세의 이러한 행동이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혼란을 염려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경쟁자가 없는 사이에 찬탈하기 위한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이후에 다시 형제간의 분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 명의 남작이 급하게 프랑스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가 사건의 범인인지 아니면 누명을 쓴 것인지도 현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헨리 1세의 즉위에 대해 많은 귀족들이 반발하였는데, 그들은 장남인 로베르를 지지하였다. 적어도 헨리 1세의 이러한 행위는 일종의 찬탈 행위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이에 헨리 1세는 '자유 헌장'을 발표하여 불만을 잠식시키고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또 윌리엄 2세와 불화를 겪었던 '안셀무스' 대주교를 다시 불러들여 교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죽은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막 돈카다'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북부의 안정을 꾀했다. 1101년 원정에서 돌아온 로베르는 잉글랜드에 상륙하였고, 두 형제는 서로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게 되었으나, 이번 형제간의 분쟁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영지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로 확정하였고, 헨리 1세가 로베르에게 매년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기로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정당한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서로 영지를 상속한다는 '알톤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두 형제의 당면한 문제는 평화롭게 막을 내렸지만, 헨리 1세는 잉글랜드에서 자신에게 반발한 귀족들을 숙청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또 이러한 시도를 노르망디 내에서도 계속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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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정복

노르망디는 로베르가 통치하는 동안 혼란이 계속되었고, 이를 빌미로 헨리 1세는 계속해서 노르망디에서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1105년 노르망디 주변의 백작들의 협조와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의 묵인 아래 노르망디 침략을 감행하여 서부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듬해인 1106년에 헨리 1세는 다시 한번 노르망디로 쳐들어갔으며, '탱슈브레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베르를 생포하였고, 명실공히 노르망디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헨리 1세는 어디까지나 노르망디의 해방자를 표명하며 스스로 노르망디의 공작으로 칭하지 않았는데, 노르망디의 공작은 프랑스 왕의 신하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헨리 1세에게 잡힌 로베르는 이후 사망하는 1134년까지 평생 동안 구금되었다고 한다. 헨리 1세는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웨일스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잉글랜드 국내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새로 장악한 노르망디 지역도 인근 영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잘 관리한 것을 보면, 헨리 1세는 상당한 수완가였던 것 같다. 헨리 1세는 왕실 문서나 재정을 관리하는 별도의 부서를 설치하기도 하였고, 순회법정제도를 시행하는 등 잉글랜드의 초기 관료제를 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와의 마찰은 다시 시작되었는데, 헨리 1세와 교황 '파스칼 2세'는 성직자의 임명권을 가지고 갈등을 겪었고, 이에 따라 안셀무스 대주교도 헨리 1세에게 반발하였기 때문에, 안셀무스 대주교는 다시 한번 잉글랜드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화해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왕은 성직자의 임명권을 포기해야 하였으며, 성직자의 충성 맹세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성직자들은 축성 전에 왕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맺어지는 '보름스 협약'의 모태가 되었다고도 한다.

후계자 문제

1108년 '루이 6세'가 프랑스의 새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헨리 1세에게 노르망디의 공작으로서 사실상 신하로서 행동하도록 요구하였고, 헨리 1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두 왕은 서로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였지만 실제 전투까지는 이어지지 않았고, 이들은 짧은 논쟁 끝에 일단 문제를 뒤로 밀어 두고 퇴각하였으며, 이로 인해 노르망디 인근 지역이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또 이 해에 헨리 1세는 6살 난 딸 '마틸다'를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와 약혼시켰다. 헨리는 노르망디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반대파들은 로베르의 아들인 '윌리엄 클리토'를 노르망디의 새 공작으로 내세우려고 하였다. 헨리 1세와 루이 6세 사이에 치열한 정치공작이 벌어졌고, 11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윌리엄 아델린'을 적법한 후계자로 지정하여 노르망디의 공작으로서 루이 6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합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고, 헨리 1세는 계속되는 침략과 반란을 막아내느라 1118년에 아내가 죽었을 때도 잉글랜드로 가지 못하고 노르망디에 있었다고 한다. 전황은 좋지 않았지만, 헨리 1세는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정략결혼시켜 지원을 얻어냈고, 1119년 '브레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루이 6세는 윌리엄 아델린을 노르망디의 공작으로 인정하고 물러났다. 이로서 노르망디의 혼란은 잦아드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겼는데, 1120년 공식 후계자인 윌리엄 아델린이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건너가다가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사망한 것이다. 헨리 1세에게는 꽤 많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사생아로 적합한 후계자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재혼하였지만 아이를 얻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정략결혼을 통해 맺은 동맹이 깨지면서 노르망디 인근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헨리 1세는 직접 다시 노르망디로 향해 반란을 진압하느라 고군분투하였다. 1125년에는 딸 마틸다의 남편인 하인리이 5세가 사망하였는데, 이에 헨리 1세는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데려와서 공식 후계자로 지명해 버렸다. 그리고 여러 귀족들을 불러 그녀에게 충성맹세를 시켰는데, 당시에는 여성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반발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윌리엄 클리토가 위협이 되었지만, 그가 1128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후계자 분쟁의 위협이 충분했기 때문에, 헨리 1세는 마틸다를 앙주의 백작인 '풀크 5세'의 아들 '조프루아 5세'와 혼인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헨리 1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계구도는 계속해서 불안하였고,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면서 그것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헨리 1세는 노르망디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계속 노르망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는 도중에 칠성장어를 너무 많이 먹어서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왕의 시신을 옮기기 위해 많은 유력 귀족들이 노르망디에 발이 묶여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 헨리 1세의 조카인 블루아의 '스티븐'이 재빨리 빈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1153년까지 약 18년간 있었던 권력쟁탈을 위한 내전시기를 '무정부시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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