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서량의 금마초「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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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명장의 후예

'마초'(馬超)는 176년 중국의 '후한' 말기에 태어났는데, 자는 '맹기'(孟起)를 썼다. 마초의 집안은 후한의 개국공신인 '마원'의 후예로, 아버지 '마등'은 '관중십장'이라고 불리던 지역 유력자 중에 한 명이었다. 마등의 어머니는 '강족'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들과 어울리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후한 말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군에 투신하였고, 이후 그와 관련하여 벼슬을 받아 '정서장군'이 되었으며, 세력을 모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인근에는 '진서장군' '한수'가 있는데, 그도 관중십장 중 한 명으로, 마등과 비슷한 경위를 밟아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마등과는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는 일종의 라이벌과 같은 관계였다. 마등과 한수는 한때 의형제를 맺기도 하였으나, 이내 다시 사이가 틀어져 196년에는 둘이 크게 싸웠고, 이 과정에서 한수가 마등의 처자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마초도 이때 아버지 휘하에서 싸움에 참가하여 한수의 부하 장수였던 '염행'과 맞붙었는데, 이때 염행은 자신의 '모'가 부러지자 그대로 창대로 마초의 목을 쳐서 마초는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한다. 한편 '원소'는 '조조'에게 '관도대전'에서 패한 이후에 202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원담'과 '원상'이 세력을 이어받아 조조와 싸우고 있었는데, 이들은 '흉노'의 지원을 받아 '곽원'과 함께 군대를 보내 조조의 배후를 치게 하였고, 마등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동조하여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이에 조조의 세력은 위험에 빠지게 되었는데, 당시 '사례교위' '종요'가 마등과 한수에게 서신을 보내 둘의 사이를 주선하여 화해하게 하였고, 이에 마등은 생각을 바꾸어 조조를 돕기로 하였다. 이때 마초는 군대를 이끌고 '독군종사'로 종요 휘하에 합류하였는데, 전투 중에 다리에 화살을 맞자, 그 화살대를 부러트리고 상처부위를 가죽주머니로 감싼 뒤 그대로 싸움을 계속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마초의 부장 '방덕'이 곽원을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고, 마초는 '서주자사'와 '간의대부'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일가몰살

하북을 장악한 조조는 다음 목표를 형주로 잡았는데, 관중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 때문에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에 '장기'를 보내어 마등 등을 설득하여 은퇴하도록 하였다. 마등은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미 조정에 자신을 위한 준비가 다 되어있자 마지못해 은퇴하였다. 208년 마등은 '위위'로 임명되었으며, 일가족을 모두 이끌고 '업'으로 이주하였고, 아들 '마휴'는 '봉거도위', '마철'은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단지 '마초'만은 업으로 옮기지 않았는데, 그는 '편장군'에 임명되어 마등의 세력을 그대로 관리하였으며, 마등을 대신하여 새로 관중십장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 선택은 이후 비극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211년 조조가 한중을 장악하고 있는 '장로'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서쪽으로 보내자, 관중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들은 모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조조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던 관중십장은 모두 군대를 일으켜 거병하였고, 이들은 빠르게 나아가 동관을 점거하였는데, 그 숫자가 1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마초는 한수에게 협력을 요청하면서, 자신은 아버지인 마등을 버리고 한수를 아버지처럼 삼겠으니, 한수에게도 자식을 버리고 자신을 자식처럼 삼아달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마등과 마찬가지로 한수의 자식들이 조조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이들의 반란으로 인해 업성에 있던 마등을 비롯한 마씨 일가는 모두 처형되었다.

이간계

조조는 먼저 '조인'을 보내 맞서게 하였는데, 당시 관서군은 잦은 실전을 통해 훈련된 정예병으로 그 기세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조인에게 싸우려들지 말고 굳게 지키도록 엄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관중십장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하 위계가 없었고, 상시 다투고 견제하였기 때문에 서로를 정말로 믿지 못하였으며, 당면한 위기에 대응하여 각자가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결속력이 형편없었다. 후에 도착한 조조는 '서황'을 시켜 황하 북쪽을 건너 자리 잡게 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마초가 한수에게 북쪽의 방어를 더 강화해서 조조가 도하할 수 없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수는 마초의 의견에 반대하였고, 다른 장수들의 호응도 받지 못하였다. 이후 조조가 황하를 도하할 때 먼저 물자와 부대를 보내고, 조조는 후미에 있었는데, 마초가 1만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와 공격하였다. 이때 조조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허저'가 조조를 배에 태우고, 한 손에는 말안장을 들어 화살을 막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고 하며, 조조군의 '정비'라는 자가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소와 말들을 풀어놓아서, 마초의 병사들을 교란하였다고 한다. 결국 관서군은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동관을 버리고 물러나 '위구'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다시 조조군이 위수 남쪽으로 진영을 세웠는데, 관서군은 이를 급히 공격했지만, 조조군의 책략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결국 싸움이 길어지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관서군에게 남은 선택지는 평화협상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이에 응할 생각이 없었는데, 당시 관서군은 사실상 마초와 한수가 중심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조조는 그 둘의 사이를 갈라놓아 관서군을 와해시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일단 회담을 시작하기는 하였으나 조조는 한수와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끌었고, 마초는 마초대로 회담 중에 조조를 사로잡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조조가 일부로 고친 흔적이 있는 편지를 한수에게 보내는 등, 한수가 의심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였고, 결국 관중십장 사이에는 의심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후 교섭이 결렬된 관서군은 조조군과 싸워 대패하였고, 마초와 한수 등은 근거지인 양주지역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이들을 완전히 섬멸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방향을 돌려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마초가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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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의 재기

213년 마초는 양주에서 강족과 저족의 도움을 받아 다시 세력을 일으켰는데, 각지에서 마초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조조의 세력에 남은 곳이 기성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초는 군대를 이끌고 가 기성을 점령하였고, 이내 빠르게 성밖으로 군대를 몰아 구원오던 '하후연'까지 격퇴하였다. 그러나 마초는 휘하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조조 휘하에 있던 관리들을 그대로 데려다 쓸 수밖에 없었고, 이는 또 다른 비극을 낳게 되었다. 이들은 겉으로는 마초를 따르는 척하면서 뒤로는 모의하여 음모를 꾸몄고, 인근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초를 유인한 후에 다시 기성을 장악하여 마초의 처와 일가를 모두 살해하였다. 결국 근거지와 가족을 잃은 마초는 한중으로 가 장로에게 의지하였다. 214년에 마초는 다시 장로에게 군사를 빌려 양주 지역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하후연이 재빠르게 지원군을 보내었고, 이에 마초는 싸움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장로는 마초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었는데, 주위에서 마초가 배신하여 마등이 죽은 것을 거론하면서 말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마초가 수차례 장로에게 군사를 빌려 양주를 노렸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한중 사람들의 마초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도 없었겠지만, 마초 자신도 상당한 자격지심에 시달렸던 것 같다. 결국 마초는 한중에 첩과 아들 '마추', 부하 '방덕'까지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가 저족 부락으로 향했다고 한다. 마추는 후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처형되게 된다.

오호대장군

이 당시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기 위해 '유장'이 다스리고 있던 성도를 공격하던 중이었는데, 그는 마초가 저족 부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회'를 보내 설득하도록 했다고 한다. 마초가 이에 응해 군사를 이끌고 성도 북쪽으로 내려왔는데, 그 후 열흘이 지나기도 전에 유장이 항복하였고, 유비는 마초를 '평서장군'으로 임명되었다. 218년 유비는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향했는데, '장비'와 마초, '오란' 등이 무도군 하변현으로 진군하였으나, '조홍'에게 패해 다시 유비에게 합류하였다. 이듬해인 219년에 한중을 장악한 유비가 '한중왕'의 자리에 오르자, 마초는 '좌장군'에 임명되어, '관우', 장비, '황충'들과 함께 사방장군이 되었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서는 여기에 '조운'을 더해 '오호대장군'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221년에 마초는 '표기장군'이 되었으며, '양주목'에 임명되어 '태향후'로 봉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222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내용만 보면 마초는 유비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운적도 없는데 비해 높은 지위에 오른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에는 마초가 저족이나 강족에게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촉은 위치상 저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마초가 존재함으로 인해 저족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고, 이후 '제갈량'을 중심으로 한 촉의 북벌은 강족이 있는 양주와 가깝기 때문에, 만약 마초가 오래 살았다면 분명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초는 장수하지 못했고, 당시 후사로 촉에서 얻은 어린 아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족은 친척인 '마대'에게 맡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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