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의 효선황제 선제 「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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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극적인 신분의 변화

'유순'(劉詢)은 본래 이름이 '유병이'로 기원전 91년경에 태어났는데, 전한 무제 '유철'의 아들 태자 '유거'의 손자이다. 그는 별일 없이 자랐다면 다음 황제의 손자로 본인이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거나 못해도 왕으로 봉해질 수 있었겠지만, 그가 태어난 해에 벌어진 '무고의 화'로 인해 완전히 다른 운명을 겪게 되었다. 무제의 측근이었던 '강충'은 유거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당시의 흉흉한 상황을 이용해서 유거를 무고하였고, 이 일이 커지면서 유거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유거의 일가는 역모로 처벌되었고, 갓난아이였던 유순만이 감옥을 담당하던 관리인 '병길'의 조치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유순은 감옥에서 두 명의 여죄수의 젓동냥을 받으며 연명하였고, 이후 유거가 무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면되었는데, 가족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외가에서 평민으로 자랐다. 그러나 사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순의 지위는 복권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후로도 병길이 계속 그를 도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기원전 74년에 '소제'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당시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곽광'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새 황제 물색하고 있었다. 곽광은 처음에는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내세웠는데, 이내 그의 행실이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다며 폐위시켰고, 혈통이나 정통성은 분명했지만, 사실상 평민이나 다름없는 유순이 다음 황제로 지목되었다. 유순은 당시 완전히 평민이나 다름없었는데 본격적인 후계자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결혼도 하급관직에 있다가 죄를 저질러 환관이 된 '허광한'의 딸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순의 처지는 곽광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는데, 유순에게는 경계해야할 친척이나 세력이 일절 없었으며, 그는 조정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곽광 밖에 없게되었다. 이처럼 유순은 황족에서 죄인이 되었다가, 풀려나 평민으로 살다가 황제가 되는 기이한 운명을 겪게되었다.

곽광의 죽음과 곽씨 집안의 몰락

곽광은 무제가 집권하던 시절부터 총애받았으며, 그 후계자인 소제 시절에도 이미 거의 정점에 가까운 권력을 누렸는데, 유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사실상 황제나 다름 없는 권세를 누렸다. 애초에 유순은 황제의 자리에 오를때부터 곽광을 두려워하였는데, 그는 모든 일은 먼저 곽광에게 물어보고나서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관백'(關白)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일본 전국시대에 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본다 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책이 되었다. 유순은 황제가 되기 전에 결혼했던 허광한의 딸 '허씨'를 데려다가 그대로 황후로 삼아 '공애황후'가 되었는데, 기원전 71년에 병이나 사망하였고, 이듬해에는 곽광의 막내 딸 '곽성군'이 황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애황후의 죽음은 사실 곽성군의 어머니가 딸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어의를 매수하여 독살한 것이라고도 한다. 또 유순도 후에 이 일에 대해 알게되었으나, 곽광의 위세가 두려워 직접적으로 처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곽광의 위세는 끝을 몰랐지만 수명에는 한계가 있었고, 기원전 68년에 곽광이 사망하자 유순이 직접 장례를 주관하여 제왕의 예로 치루어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유순은 직접 통치를 시작하였지만, 곽광의 위세는 죽은 후에도 대단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들과 심복들이 조정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순은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섣불리 나서지 못했는데, 이때 어사대부였던 '위상'이 공신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공이 없는 자들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고 한다. 이 상소를 받아본 유순은 조정에 곽광의 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어 힘을 얻었고, 위상을 중용하면서 장인인 허광한을 비롯한 허씨 외척들과 자신의 할머니쪽 외가인 사씨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유순의 지시아래 곽광의 후손들과 측근들이 가지고 있던 군권 등 실권을 빼앗았는데, 이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승진이기는 하지만 실권이 없는 자리로 옮기거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태수로 보내는 등 교묘하고 철저하게 조치하였다. 그 와중에도 공애황후의 아들 '유석'이 태자에 오르자, 곽광군의 어머니는 이에 불만을 가지고 태자를 독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유순이 공애황후 사후에 아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곽씨들도 뒤늦게 이러한 유순의 움직임을 눈치챘는데, 그들은 위상과 허광한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66년 음모가 누설되어 체포되었고, 곽광의 후손들과 측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여기에 연루되애 해를 입은 집안이 1천여 가구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곽광의 후손 중에는 오직 황후였던 곽광군만 살아남았는데, 이후 폐위되어 유폐되었고, 몰락한 가문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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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출신 황제

무제 시절에 한나라는 고조선, '흉노', '남월'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하였지만, 대외원정을 남발하면서 막대한 재정이 낭비되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들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의 엄격한 유교주의 관점에서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려웠는데, 직접 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유순이 황제가 되면서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다. 유순은 법가주의적 관점에서 개혁을 진행하였는데, 평민이라하더라도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내렸고, 형벌을 강화하여 범죄 예방에 힘썼다. 나아가 국내의 피폐한 경제에 의한 피해를 완화시키기 위해 상평창을 설치하는 등 백성을 구휼하였고, 세금을 감세하는 등 내정을 주시하는 정책을 폈다. 유순의 시행한 정치를 '정평송리'(政平訟理)라고 하는데, 공평하고 이치에 맞는 정책으로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오손'과 제휴하여 흉노를 견제하고 분열시키는 정책을 폈는데, 이때 분열하여 서쪽으로 진출한 흉노족이 후에 '로마 제국'을 괴롭히는 '훈족'의 시조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기원전 60년에는 서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기원전 51년에는 흉노의 군주인 '호한야' 선우를 항복시키기도 하였다.

태자와 태자비

기원전 49년에 유순이 사망하였는데, 당시 43세의 나이로 황제로 즉위한지 26년만 이었다. 제위는 그의 아들인 '유석'이 이어 '원제'가 되었고, 황손을 낳은 '왕정군'이 황후가 되었다. 한때 유순은 유교에 심취해 있던 유석이 뒤를 잇는 것을 우려하여 폐위 시킬 것을 고민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왕정군이 아들을 낳은데다가, 자신도 일가친척이 모두 몰살되고 혈혈단신의 몸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왕정군의 조카인 '왕만'이 조정을 장악하고, 강제로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건국하면서 전한이 멸망하게 된다. 사실 전한의 멸망은 유순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기는 하나, 이 당시 그의 선택으로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운명의 기구함과 함께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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