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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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태생의 첫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1804년 미국의 뉴햄프셔 주의 힐스보로에서 태어났다. 피어스의 아버지 '벤자민 피어스'는 지역 유력자였는데, 그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전쟁 이후에는 준장으로 지역 민병대의 지휘관으로 있었다. 또 저명한 민주공화당 정치인으로, 뉴햄프셔 주의 하원의원을 역임하고, 두 번이나 뉴햄프셔 주지사를 지냈다. 피어스는 이러한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힐스보로에서 학업을 시작하였고, 12세에는 핸콕에 있는 학교로 옮겼다가, 다시 필립스 엑스터 학교로 옮겨 대학 입학을 준비하였다. 1820년에는 메인 주에 있는 '보딘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초기에는 공부보다 사회운동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성적이 나빴지만, 후에 다시 공부에 집중하여 1824년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주홍글씨'로 유명한 '너새니얼 호손'과 대학에서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피어스는 대학 졸업 후에 뉴햄프셔의 주지사를 지낸 '리바이 우드버리' 밑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고,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노샘프턴 법률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가, 1826년에는 뉴햄프셔 주 암허스트의 판사 밑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827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힐스보로에 업무를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정치활동

1827년 피어스의 아버지 벤자민 피어스는 민주당 후보로 뉴햄프셔의 주지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당시부터 피어스도 민주당의 '앤드루 잭슨'을 지지하며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1829년에는 피어스가 뉴햄프셔 주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31에도 뉴햄프셔 주의 하원의장이 되어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여, 지역 민주당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833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35년에는 재선에 성공하는 등 피어스는 순조롭게 정치 활동을 계속 이어갔고, 1836년에는 32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의원에 선출되어 최연소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피어스가 상원의원 임기를 시작한 1837년은 미국에서는 공황이 일어나는 별로 상황이 좋지 않았고, 그의 가족들의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피어스는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들을 고려하여 1842년에 상원의원직을 사임하였다. 콩코드로 돌아온 피어스는 변호사 업무에 집중하였지만, 지역 민주당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는 등,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병행하였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피어스는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는 당시 대통령인 '제임스 녹스 포크'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포크는 피어스에게 법무장관으로 내각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전쟁에 참전하였다. 피어스는 다른 평범한 백인 남성들처럼 지역 민병대에 속해 있었지만 전투 경험은 없었는데, 포크는 그를 대령으로 임명하여 보병 연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피어스는 이듬해인 1847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윈필드 스콧'의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부대를 이끌기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피어스는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참전자로서 의무를 다하였고, 그의 행동은 뉴햄프셔에서 그의 인기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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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14대 대통령

1852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에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난항을 겪어야 했고, 피어스는 정치적 영향력이나 명성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타협안으로 후보로 선출되었다. 평소 피어스의 정치 활동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그의 아내는, 피어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였다고도 한다. 휘그당은 미국-멕시코 전쟁의 영웅인 스콧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지만, '1850년 타협' 이후로 노예제를 둘러싸고 당이 분열하기 시작한 영향도 있어, 선거에서는 피어스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피어스의 대통령직은 시작하기 전부터 별로 좋지 못했는데, 그의 가족은 그가 취임하기 직전에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는데, 이때 일어난 열차 탈선 사고로 인해 하나 남은 아들이 사망하였다. 이 충격으로 그의 아내는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한동안 두문불출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 피어스와 함께 당선된 부통령 '윌리엄 킹'은 결핵으로 쿠바에 요양을 가 있었는데, 그의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았기 때문에 의회의 배려로 특별히 하바나에서 취임 선서를 할 수 있었다. 다음 달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부통령의 사망 시에 대한 규정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어스의 임기동안 부통령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피어스는 노예제 등을 둘러싸고 분열되어가고 있는 민주당을 결속시키기 위해 여러 성향의 사람들로 내각을 체우는 등 노력하였고, 비효율적인 재무부를 개선하도록 명령하는 등 행정 개혁에도 힘을 쏟았다. 또 미국 팽창주의를 지지하여, 하와이 제도 합병을 주창하거나 '개즈던 매입'을 추진하였고, 이 시기에 '매슈 캘브레이드 페리'가 함대를 이끌고 일본으로 가서 협박을 통해 통상 교섭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으며, '구아노 제도법'을 통과시켜 주인이 없는 섬을 미국에 병합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노예제를 둘러싼 대립

피어스 정부가 균형을 유지하며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뒤흔드는 화두는 결국 노예제였다. 새로 편입될 캔자스 주와 네브래스카 주는 소위 '미주리의 타협'으로 암묵적으로 그어진 기준선의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그 위치에 따라 노예주와 자유주가 나뉘었기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이때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추진되면서, 두 주는 각 주에서 시행하는 투표를 통해 노예제에 관한 내용을 결정하게 하였고, 이는 노예제 지지자와 반대자, 양쪽 모두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이미 시행되었던 1850년의 타협으로 캘리포니아가 자유주가 되면서 미주리의 타협은 이미 깨졌다고도 볼 수 있었는데, 특히나 남부의 노예주들은 이미 한번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캔자스 주를 노예제로 선언해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많은 노예제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투표에 영향을 주기 위해 몰려들면서 혼란이 빚어지고, 그 와중에 '피의 캔자스'라고 불리는 무력충돌까지 일어나면서 정국은 혼돈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분열되어 공화당이 생기게 되고, 휘그당은 완전히 와해되고 미국당이 새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국내에서 그치지 않아서, 당시 노예 해방운동이 한창이었던 스페인령 쿠바에 대해,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매각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이 침략하더라도 정당하다는 '오스텐트 성명'이 유출되면서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은퇴와 사망

1856년 5월 의회에서 노예제 반대 연설을 한 자유토지당의 '찰스 섬너'를 민주당의 '프레스턴 브룩스'가 공격한 '브룩스-섬너 사건'은 당시 노예제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극렬한 반목을 잘 나타낸다. 이 공격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섬너는 북부의 자유주에서 순교자가 되었고, 브룩스는 남부의 노예주에서 영웅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 사실상 노예제 찬성자로 평가받게 된 피어스는 지지를 얻기 어려웠고, 1856년에 행해진 대통령 선거에는 '제임스 뷰캐넌'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민주당은 이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이미 분열되어 새로 공화당이 생겼고, 노예제를 둘러싼 극렬한 대립은 '남북전쟁'으로 표출되게 된다. 은퇴한 피어스는 건강이 악화된 아내를 위해 국외로 나가 '마데이라 제도'를 방문하여 요양하였고, 이후 유럽과 바하마를 방문하는 등 3년간 여행하였다. 귀국한 피어스는 정치활동을 이어가며 남북의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였다. 전쟁동안 당시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몇몇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배신자나 남부의 스파이 등으로 매도당하기도 하였다. 1863년에는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인 1864년에는 절친한 친구인 호손이 사망하면서 슬픔에 빠졌고, 이는 그가 술을 과음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피어스는 말년에 술을 줄이고 건강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1869년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는 지나친 음주로 인해 건강을 해쳤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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