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유년시절 '주유검'은 1611년 중국 명나라 때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태자인 '주상락'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유검은 명나라 황태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형편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어머니인 숙녀 '유씨'는 낮은 신분으로 주상락의 총애를 받지도 못했고, 그가 5세가 된 1614년에 사망하였다고 하며, 그 또한 다섯 명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주상락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만력제는 주상락의 이복동생인 '주상순'을 새로 후계자로 세우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궁궐 내 정치싸움의 한가운데 있던 주상락은 주유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1615년 '정격안' 사건으로 주상락의 태자 지위가 공고해졌지만, 이미 실질적 보호자도 잃고 정치적 보호자..
한족화된 흉노족 '유연'(劉淵)은 중국의 후한말 삼국시대인 252년경에 '조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한족이 아닌 흉노족 출신으로 흉노족의 이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까지 전해진 내용은 없다. 유연의 일족이 중원에 정착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어부라' 때인데, 어부라는 187년에 아버지 '강거선우'의 명을 받아 한나라의 내전에 개입하였다가, 이듬해 이에 반발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강거선우를 죽이면서 근거지인 '이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원을 떠돌게 되었다. 196년 어부라가 사망한 이후에는 동생 '호주천'이 선우의 자리에 올라 세력을 이어받았으며, 아들 '유표'도 그의 휘하에서 중원의 군웅할거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여기서 유표가 유연의 아버지인데, 그는 스스로 한족화되어 한..
말단 관리의 딸에서 황태후까지 '서태후'는 중국 청나라 시대인 1836년에 태어났는데, 성은 '예허나라'(葉赫那拉)로 추정되며 이름은 '행정'(杏貞) 또는 '행아'(杏兒)라고 전해진다. 불분명한 것은 이름뿐만이 아닌데, 서태후의 출신지가 안후이성 우후라는 이야기도 있고, 내몽골 자치구의 후허하오터, 산시성의 창치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의 부친인 '예허나라 후이정'이 베이징에서 하급 관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피차이 후통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녀는 어려서는 꽤 유복한 생활을 하였던 것 같지만,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화병으로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이 때문에 허드렛일을 하다가 당시 청나라의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다고 하며, 당시 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 ..
반란군의 우두머리 '장헌충'은 중국 명나라 시기인 1606년 섬서성 연안부 정변현의 유수간보에서 태어났다. 장헌충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는데, 그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대추 장사를 하며 집안을 도왔다고 한다. 이후 독학하여 연안부의 포졸이 되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파면당했고, 다시 군에 입대하여 국경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범죄를 저질러 쫓겨나게 되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연거푸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보면, 사람이든 인생이든 어딘가 꼬여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안 좋은 전력이 생긴 장헌충은 앞으로 출세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것인데, 행인지 불행인지 당시는 명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기로 1627년에 섬서성 일대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이듬해인 1..
진나라의 목공 '목공'의 이름은 '영임호'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진(秦)나라의 '덕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주나라의 서쪽 국경 역할을 하였으며, 지리적 위치상 주로 이민족인 '서융'과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하다. 진나라는 중원의 다른 제후국들과는 풍습이 크게 달랐다고 하는데, 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백성들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대다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진나라는 초나라처럼 완전히 이민족으로 취급받지는 않은 것 같고, 어디까지나 주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기원전 676년에 덕공이 사망하자 장남인 '선공'이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기원전 664년 그는 공위에 오른 지 9년 만에 사망하여 동생인..
랙랜드 존 '존'은 1166년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이며,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소유한 '헨리 2세'와 '에레오노르'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는 형이 3명 있었는데, 1169년에 각각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아키텐, 브르타뉴를 상속받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헨리 2세는 존이 별도로 상속받을 땅이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우스갯소리로 '랙랜드'(Lackland)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헨리 2세는 막내아들에게 영지를 구해주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는 사보이의 백작 '훔베르트 3세'의 딸과 존을 약혼시켜 백작 사후에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동시에 이 정략결혼을 통해 아키텐 남부의 국경지대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헨리 2세는 이 정략결혼..
고향을 등진 오기 '오기'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그 출신이 명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본래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강단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하루는 자기보다 훨씬 센 건달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 맞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오기는 다음날 다시 그 건달을 찾아가 시비를 걸었고, 또 두들겨 맞고 나서도 계속 그를 찾아다니면서 덤벼들었는데, 결국에는 오기의 집념에 진 건달이 싸움에서 일부로 져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오기는 심지가 굳고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벼슬을 얻어 출세하기 위해 여러 명망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는데, 실속은 얻지 못하고 집안의 재산만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는데, 오기는 분노를 참지..
초나라의 춘신군 '춘신군'의 이름은 '황헐'로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초나라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해나 유년시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중국에는 그의 증조부인 '경수공'이 신라로 피난 간 적이 있어 춘신군도 이때 어린 시절을 신라에서 지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그는 초나라의 '경양왕' 휘하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것 같은데, 기원전 273년에 진나라가 위나라와 한나라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격하자, 사자로 진나라에 보내져 화평을 청했다고 한다. 춘신군은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진나라와 초나라가 중원의 최고 강대국인데, 두 호랑이가 서로 싸워봤자 이득을 보는 것은 주변의 개들 뿐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이에 설득당한 소양왕이 전쟁을 멈추어 초나라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 초나..
몰락하는 명나라의 장군 '오삼계'는 1612년 중국 명나라에서 태어났다. 오삼계의 집안은 본래 강소성 고우에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오양'이 명나라의 장수로 요동 지방에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동에서 태어나 자라게 된다. 오삼계는 소년시절에 아버지가 후금군에 포위되자 홀로 뛰어들어 구해냈다고 하는데,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렸을적부터 군대와 가까이에서 생활하며 군사적 재능을 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입대하여 아버지와 함께 군생활을 이어간 것 같고, 1631년에 오양이 '달링허 전투'의 패배로 인해 하옥되면서, 그가 아버지의 직위였던 요동총병을 이어받게 되었다. 1641년에는 29세의 나이로 영원성에서 명나라 군대를 지휘하는 제독이 되었는데, 이후 벌어진 '송산 전투'에서 청나라..
변방 이민족의 나라 '구천'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의 왕 '윤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월나라는 중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중원의 한족들은 이들을 이민족으로 생각하였지만, 월나라의 왕들은 스스로를 하나라의 후손이라고 여겼으며, 구천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구천이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기록은 없으나, 기원전 500년경부터 아버지 윤상을 대신해 국정을 돌본 것으로부터 추정하여 약 기원전 52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나라는 주나라의 변경 밖에 위치하고 있어, 주나라에서 정식으로 봉작을 받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이민족으로 취급받았으며, 그 위치상 오나라와 함께 강성한 초나라의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오나라와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
위나라의 공손앙 '상앙'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390년경에 태어났는데, 위(衛)나라 사람으로 위(衛)나라 군주의 서자 출신이라고 한다. 그의 본래 이름은 '공손앙'으로 어렸을 때부터 법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형명학에 관심을 가졌고, 장성하여서는 위(魏)나라로 건너가 당시 위(魏)나라의 재상이었던 '공숙좌'의 휘하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공숙좌는 기원전 360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는 죽기 전에 모시고 있던 위나라의 '혜왕'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상앙을 추천하면서 쓰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죽이라고 진언하였다고 한다. 이는 상앙이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제거하라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전폭적으로 추천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는데, 혜왕은 공숙좌의 말을 대수롭지 ..
위나라의 신릉군 '신릉군'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위무기'이다. 그는 위나라 '소왕'의 아들로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그 뒤를 잇자, 이복동생인 그는 신릉군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신릉군은 전국시대의 유력자들인 '전국사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데, 그도 다른 이들처럼 많은 식객들을 데리고 있어, 그 수가 3,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 번은 신릉군이 안희왕과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조나라의 군대가 국경에 출몰했다는 급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안희왕은 크게 당황했는데, 신릉군은 태연한 자세로 계속 바둑을 이어가면서 조나라의 왕이 사냥을 나왔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후 정말 신릉군의 말대로였기 때문에 안희왕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는데, 신릉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