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의 후계자 '이융기'는 685년경 당나라 황제인 '예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690년 할머니인 '측천무후'가 새로 나라를 세우고 예종에게서 황제위를 빼앗았기 때문에, 예종은 다시 황태자로 강등되었다. 이융기는 어렸을 때부터 측천무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의 어머니가 측천무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705년에 '신룡정변'이 일어나 당나라가 재건되어 예종의 형 '중종'이 다시 복위하였으며, 측천무후도 얼마 안 있어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황궁에는 측천무후가 불러온 여권신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황후가 외척을 앞세워 정치에 개입하던 것에서 나아가,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여성황제가 되려는 이들이 생겨났다. 중종의 아내인 '위황후'와 딸 ..
무정부시대를 지낸 잉글랜드의 후계자 '헨리 2세'는 1133년경 앙주의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과 잉글랜드의 왕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헨리 1세'의 딸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틸다는 헨리 1세의 공식 후계자였기 때문에, 순조롭게 간다면 헨리 2세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상속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헨리 2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1135년, 노르망디의 반란 진압 직후에 헨리 1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상황이 어그러지게 되었다. 마틸다 부부는 헨리 1세 생전에 노르망디 공작위를 승계하기를 원하였지만 거절되었고, 이 때문에 노르망디의 반란군 편을 들고 있었다. 게다가 헨리 1세의 공식 후계자인 마틸다가 여자였고, 어린 시절에 전남편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
진나라의 후계자 분쟁 '문공'의 이름은 '희중이'인데 중국 춘추시대 사람으로 '사기'에는 기원전 697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춘추좌씨전'에는 기원전 671년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는 진(晉)나라의 군주인 '헌공'과 적족의 '호희'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는데, 기골이 장대하여 아버지가 태자였을 때 이미 성인이나 다름없는 체격이었다고 하며, 젊었을 때부터 여러 인재들과 어울려 그들을 부하로 삼았다고 한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왕족이 세운 국가로 주나라의 왕성인 '희'성을 쓰는데, 본래 방계였던 문공의 할아버지인 '무공'이 직계를 모두 멸하고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무공의 뒤를 이은 헌공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먼저 제나라의 출신 정부인과의 사이에서 '희신생'을 낳았고, 다시 포로로 잡은 적..
한서를 저술한 반고 '반고'(班固)는 부풍 안릉 사람으로 자는 '맹견'(孟堅)을 쓰며, 중국 후한시대인 32년에 태어났다. 반고의 집안은 전통적인 학자 집안으로 반고는 전한 '무제' 시절에 월기교위를 지낸 반황의 증손자가 되며, 아버지 '반표'는 '사기'의 후전을 편찬하는 등 역사 저술활동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반표의 행적은 반고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반고는 아버지로부터 독서와 학문의 기초를 배워 아홉 살에는 이미 문장에 능했다고 하는데, 16세가 되자 낙양의 태학에 들어가 여러 서적을 보며 학문을 익혔지만, 54년 반표가 사망하자 태학에서 나와 삼 년 상을 치렀다고 한다. 반고는 전한의 성립부터 신나라가 멸망하기까지를 다룬 역사서인 '한서'(전한서)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 또한 반..
집금오와 음려화 '유수'는 기원전 5년경 중국의 전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전한 황실의 종친으로 전한 '무제'의 이복형인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다. 당시 유수의 아버지 '유흠'은 진류군 제양현의 현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3년에 유흠은 남돈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고, 유수의 가족은 숙부 '유량'이 있는 채양현으로 옮겨 생활하였고, 이때부터 유수는 큰형인 '유연'을 아버지처럼 따르게 됐다고 한다. 유수는 형을 도와 농사를 부지런히 지으며 집안 살림을 도우며 생활하였고, 이즈음인 8년에 '왕망'이 선양의 형태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이 멸망하게 된다. 이 시기에 유수는 농사를 ..
당 태종의 후궁 '무조'(武照)는 중국 당나라 시절인 624년경에 이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본래 유명한 목재상이었는데, 수나라의 '양제'가 시행한 대공사로 큰 이익을 남겨 거부가 되었고,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자 당국공 '이연' 휘하에 합류하여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후 이연이 당나라를 세우면서 개국공신으로 광록대부로 태원군공에 봉해졌다가, 다시 공부상서에 응국공이 되어 이주와 형주의 도독을 역임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별로 수완이 뛰어나지는 못했는지 635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남겨진 부인과 딸들은 상당히 궁핍한 생활을 한 것 같다. 이듬해인 636년에 무조가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였는데, 이때 생활이 나아지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고 한다. 무조는 궁에서 용모가 빼어나다..
제나라의 환공 '환공'의 이름은 '강소백'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의 13번째 군주인 '희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나라는 현재의 산둥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주나라의 '문왕'이 상나라(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나라를 세우면서 공신인 '강상'(태공망)에게 내린 봉토이며, 환공은 강태공의 12세손이라고 한다. 기원전 697년경 희공이 사망하고 맏아들인 '양공'이 그 뒤를 이었는데, 환공을 보좌하고 있었던 '포숙아'는 양공이 무능하고 절제가 부족하니 난이 일어날 것이라며, 환공과 함께 거나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아직 주나라 왕실이 남아있었지만 그 권한이 쇠퇴해 군웅할거가 시작되던 시기로, 그중에서도 제나라는 상당히 강력한 국가였는데, 양공은 그 힘을 이용하여 주변 여..
블루아의 스티븐 '스티븐'은 1096년경 프랑스의 귀족인 블루아 백작 '에디엔 2'세'와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의 딸 노르망디의 '아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사망하였는데, 이때 그는 10세 정도의 나이 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 이후부터 숙부인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의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스티븐은 헨리 1세의 휘하에서 신하의 역할을 계속했던 것 같으며, 1115년에는 모르탱 백작으로 임명되었으며, 헨리 1세의 지원을 받으며 착실하게 입지를 다져나갔다. 1120년 이른바 '백선 사건'(White Ship)이 일어나 헨리 1세의 후계자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하게 되었는데, 본래는 스티븐도 이 배에 탈 예정이었지만 만취하여 상태가 좋지 않아 승선 직전에..
마씨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 '마대'(馬岱)는 마등의 조카이자 마초의 사촌동생으로, 그 태생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지만, 마초가 176년경에 출생했기 때문에 그보다 늦게 태어났을 것으로 생각되며, 마초와 같이 사례 우부풍 무릉현 사람으로 추정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대도 마등과 마초처럼 후한의 개국공신인 '마원'의 후예로 인데, 마등과 마초에 비해 별다른 업적이 없어서인지 사서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마대에 대한 내용은 크게 3가지 정도만 전해지는데, 먼저 222년에 마초가 사망하면서 마씨 일가가 조조에 의해 멸족되고 마대 밖에 남지 않았으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유비에게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마대는 마등이 조조의 권유를 받아들여 은퇴하고 업으로 향했을 때, 그전,..
측천무후의 시대 '장열'은 667년경 중국 당나라 시대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당나라 '고종'의 통치기로 이미 황후인 '측천무후'가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683년에 고종이 사망하자 '중종'이 후계를 이었으나 곧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었고, 다시 '예종'이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에 당나라 정권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모두 장악하고 있었고, 일부 황족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진압당했다. 측천무후는 여성인 자신이 전면에서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전통적인 기득권층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과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신분이나 재산이 큰 ..
체루스키 부족 출신의 게르만족 '아르미니우스'는 기원전 18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게르만족의 하나인 '체루스키 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을 로마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기원전 11년경부터 있었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大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원정 때 그의 동생 '플라부스'와 함께 인질로 로마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후 두 형제는 로마에서 교육받으며 자랐는데, 젊었을 때부터 로마 군에 입대하여 보조병으로 근무하였고, 4년경에는 로마 보조병 부대의 지휘를 맡을 정도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판노니아' 지역에서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군 경력 덕분에 로마 시민권도 획득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소위 기사계급(에퀴테스)라고 불리..
월나라를 구한 범려 '범려'(范蠡)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자는 '소백'(少伯)을 썼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기원전 517년경에 초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범려는 초나라 사람임에도 월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 초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문종'의 눈에 띄어 관직에 올랐다가, 도중에 오나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오나라에는 이미 '오자서'가 있어서 월나라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범려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월나라와 오나라의 전쟁 때인데, 기원전 496년에 초나라를 정벌한 오나라의 왕 '합려'는 오나라가 전쟁 중인 동안 오나라에 침입했던 월나라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당시 월나라는 오나라에 비해..